중앙은행은 왜 존재할까?
1694년 여름, 런던의 상인과 귀족들이 지갑을 열었습니다. 그들이 사려던 것은 상품도 땅도 아니었습니다. 국왕의 약속, 그것도 이미 여러 번 배신당한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단 12일 만에 120만 파운드,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억 5천만 파운드에 가까운 돈을 모았습니다. 그 돈을 받아 간 사람은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였고, 용도는 단 하나,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이었습니다.
이 거래의 결과물이 바로 잉글랜드은행, 세계 최초의 근대적 중앙은행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흔한 오해 하나가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이 중앙은행을 물가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관리하기 위해 처음부터 설계된 정교한 기관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은행을 만든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물가안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배당금이 나오는 안전한 투자처였고, 왕이 원한 것은 전쟁에 쓸 현금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이라는 개념은 나중에, 그것도 여러 차례의 위기를 거치며 뒤늦게 따라붙은 이름표였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태어난 은행
17세기 말 잉글랜드는 사실상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벌인 9년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났고, 그보다 앞서 찰스 2세가 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일방적으로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른바 “재무성의 대정지” 사건 때문에 왕실의 신용은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민간에서 돈을 빌리려 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때 스코틀랜드 출신 금융가 윌리엄 패터슨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왕 개인이 아니라 의회가 세금으로 원리금 상환을 보장하는 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은 왕이 아니라 법에 돈을 빌려주는 셈이 됩니다. 이 구조 덕분에 잉글랜드은행은 연 8퍼센트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이자를 약속하고도 순식간에 자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돈은 해군을 재건하는 데 쓰였고, 잉글랜드는 이후 프랑스보다 훨씬 낮은 금리로 전쟁 자금을 조달하며 서서히 해상 패권을 굳혀 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은행이 처음부터 통화정책이라는 것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잉글랜드은행은 정부의 빚을 관리하고, 그 신용을 바탕으로 은행권을 발행하고, 일반 상업은행처럼 예금과 대출 업무도 함께 하는 혼합적인 기관이었습니다. 국가의 재정 창구이자 동시에 민간 은행이었던 셈입니다. 이 어정쩡한 정체성은 이후 200년 가까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중앙은행”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
19세기 내내 국제 통화 질서는 금본위제가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각국 화폐의 가치는 금에 고정되어 있었고, 국제수지의 불균형은 금이 국경을 넘나들며 자동으로 조정된다는 것이 당시의 이론이었습니다. 이 체제 아래에서 잉글랜드은행 같은 기관들은 화폐를 발행하고 금 태환을 보장하는 역할에 머물렀을 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금리를 조절해 경기를 관리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금융위기가 터지면 어떻게 됐을까요. 놀랍게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누군가 개인이 나서서 해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720년대 남해회사 버블이 터졌을 때도, 그 이후 크고 작은 공황이 올 때마다 시장은 각자의 신용과 인맥으로 위기를 버텨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맡아줄 공적 기관이라는 개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07년, 한 노인이 은행 시스템을 구하다
대서양 건너 미국의 사정은 더 심각했습니다. 미국은 1913년까지 중앙은행이라 부를 만한 기관이 아예 없었습니다. 건국 초기 두 차례 시도된 국립은행은 정치적 반발 속에 문을 닫았고, 그 뒤로는 수천 개의 개별 은행이 각자 화폐를 발행하다시피 하는 혼란스러운 시스템이 이어졌습니다.
1907년 10월, 뉴욕에서 구리 시장을 조작하려던 투기 세력의 계획이 무너지면서 니커보커 트러스트라는 대형 신탁회사가 파산했습니다. 예금 인출 사태가 순식간에 다른 금융기관으로 번졌고, 콜금리는 하루 만에 연 9.5퍼센트에서 70퍼센트로, 며칠 뒤에는 100퍼센트까지 치솟았습니다. 이 돈을 빌려줄 곳조차 없었습니다.
이 위기를 멈춘 사람은 정부가 아니라 은행가 J. P. 모건이었습니다. 당시 일흔 살이던 그는 뉴욕의 주요 은행가들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 모아 밤새 장부를 뒤지고, 살릴 만한 은행과 그렇지 않은 은행을 직접 골라낸 뒤 구제 자금을 배분했습니다. 한 개인의 판단과 인맥에 나라 전체의 금융 시스템이 매달려 있었던 셈입니다. 사람들은 안도했지만, 동시에 불안해했습니다. 모건이 없었다면, 혹은 그가 다음번에도 살아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이 아니라 제도가 필요하다는 결론
이 불안이 결국 미국 연방준비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의회는 넬슨 올드리치 상원의원을 중심으로 국가통화위원회를 꾸려 4년에 걸쳐 유럽 각국의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했고, 1913년 12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연방준비법에 서명하면서 12개 지역 연방준비은행과 워싱턴의 이사회로 구성된 새로운 체제가 출범했습니다.
이 설계의 핵심은 단 하나의 강력한 은행에 권한을 몰아주지 않으면서도, 위기가 닥쳤을 때 정부가 공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은행이 흔들릴 때 필요한 것은 인심 좋은 노신사가 아니라, 언제든 작동하는 제도였습니다. 잉글랜드은행이 전쟁 빚 때문에 태어났다면, 연방준비제도는 금융 공황과 그 공황을 개인의 손에 맡겨야 했던 불편함 때문에 태어난 셈입니다.
물가와 싸우는 임무가 추가되다
중앙은행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얼굴, 즉 금리를 올리고 내리며 물가를 관리하는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의 일입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70년대 말 미국을 덮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1979년 물가상승률은 11퍼센트를 넘어섰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폴 볼커를 연방준비제도 의장으로 지명했습니다.
취임 두 달 만에 볼커는 통화 공급량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의 축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기준금리는 1981년 한때 19퍼센트까지 치솟았고, 이에 따라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18퍼센트를 넘나들었습니다.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의 연준 건물 앞을 막아섰고, 건설업자들은 팔리지 않은 집의 열쇠를 볼커에게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실업률은 대공황 이후 최고 수준인 10.8퍼센트까지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볼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1980년 13.6퍼센트였던 물가상승률은 1983년 3.2퍼센트로 떨어졌고, 이 사건 이후 사람들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중앙은행이 정치적 인기와 무관하게 고통스러운 결정을 밀어붙일 수 있어야만 인플레이션이라는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단어가 지금과 같은 무게를 갖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점부터입니다.
독립성이라는 불편한 권력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선거로 뽑히지도 않은 사람들이 왜 국민 생활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대통령이나 국회의 승인 없이 내릴 수 있어야 할까요.
답은 역설적입니다. 정치인은 다음 선거를 신경 쓸 수밖에 없고, 금리를 낮춰 경기를 띄우고 싶은 유혹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실제로 볼커 이전에 연준을 이끌었던 아서 번스는 닉슨 대통령의 재선을 돕기 위해 금리를 낮게 유지했고, 이것이 1970년대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중앙은행에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권한을 준 이유는, 물가안정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목표는 매번 선거를 앞둔 정치인의 손에 맡겨서는 지켜지기 어렵다는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전쟁 이틀 전에 태어나다
이 흐름에서 한국의 사정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광복 이후 한국은 식민지 시절 조선은행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통화금융정책을 세울 기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문을 열었습니다.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설립 2주 만에 6·25전쟁이 터졌고, 서울이 순식간에 함락되면서 직원들은 화폐를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급기야 한국은행 도쿄지점을 통해 화폐를 찍어 조달해야 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전쟁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중앙은행이었던 셈입니다.
한국은행의 역사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독립성이 항상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962년 5·16 군사정부는 정부 주도 경제개발계획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한국은행법을 대폭 개정해 정부의 개입 권한을 크게 늘렸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은행은 통화정책의 방향을 사실상 정부와 함께 정해야 했습니다. 이 구조가 다시 바뀐 것은 1997년 외환위기라는 또 다른 위기를 지나면서였습니다. 금융개혁의 흐름 속에서 한국은행법이 전면 개정되어 통화정책 운영의 자율성이 한층 높아졌습니다. 전쟁이 잉글랜드은행과 미국 연준을 낳았듯, 한국에서도 위기는 늘 중앙은행의 권한을 다시 정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흔들리는 원칙
이 독립성의 원칙은 지금도 완전히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연준을 비판하며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장면이 반복되었고, 이는 볼커 시대 이후 힘겹게 다져온 원칙이 여전히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한번 완성되면 영원히 유지되는 제도가 아니라, 매 시대마다 다시 시험받는 약속에 가깝습니다.
다시, 1694년의 그 서재로
돌이켜 보면 잉글랜드은행을 만든 투자자들도, 연준을 설계한 위원들도, 한국은행법을 처음 만든 사람들도 누구 하나 지금과 같은 형태의 중앙은행을 미리 그려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각자 눈앞의 전쟁 빚을, 눈앞의 예금 인출 사태를, 눈앞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려 했을 뿐입니다. 중앙은행이라는 제도는 그렇게 위기가 지나갈 때마다 조금씩 몸집과 권한을 바꾸며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뉴스에서 기준금리 발표를 볼 때, 한 가지를 떠올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숫자 뒤에는 3백 년 넘게 이어진, 전쟁과 공황과 인플레이션이 남긴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중앙은행은 정부 기관인가요?
나라마다 다릅니다. 잉글랜드은행은 원래 민간 주주가 소유한 회사였다가 1946년에야 국유화되었고, 한국은행은 설립 당시부터 자본금 없는 특수법인 형태로 정부와는 분리된 조직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역시 정부 부처가 아니라 독립된 연방기관으로, 예산과 인사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갖습니다. 다만 총재나 의장 임명권은 대개 대통령이나 정부가 갖고 있어, 완전히 정치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은 어디인가요?
1668년 설립된 스웨덴의 릭스방크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으로 꼽히지만, 근대적 중앙은행 제도의 원형으로 흔히 언급되는 곳은 1694년에 세워진 잉글랜드은행입니다. 국가 부채 관리와 은행권 발행, 이후의 최후 대출자 기능까지 이어지는 오늘날 중앙은행의 핵심 기능들이 이 은행을 통해 처음 체계적으로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은행이 마음대로 돈을 찍어낼 수 있나요?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견제 장치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화폐 발행량은 물가안정목표, 금융통화위원회 같은 정책결정기구의 심의, 시중은행과의 공개시장operation 등을 거쳐 조절됩니다. 무분별한 발행은 인플레이션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현대 중앙은행들은 대부분 물가상승률 목표치를 스스로 공표하고 그에 맞춰 통화량과 금리를 조정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왜 논쟁거리인가요?
독립성은 정치적 압력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물가안정을 지키기 위한 장치이지만, 동시에 선거로 선출되지 않은 소수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원리와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통화정책이 실업률, 대출금리, 자산가격처럼 국민 생활과 직결된 문제를 좌우하는 만큼, 그 권한을 어디까지 정치로부터 떼어놓아야 하는지는 지금도 각국에서 계속 논의되는 주제입니다.
한국은행 총재는 누가 정하나요?
한국은행 총재는 대통령이 임명하며,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칩니다. 임기는 4년이고, 한 차례 연임할 수 있습니다. 통화정책의 주요 방향은 한국은행 총재를 의장으로 하는 금융통화위원회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 결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