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사이에 선 인간

인간은 선할까, 악할까? — 2500년을 이어온 질문의 답을 찾아서

1961년, 예일대학교의 한 실험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자가 평범한 뉴헤이븐 시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버튼을 누르세요. 실수할 때마다 전압을 높이셔야 합니다.” 벽 너머에서는 낯선 사람이 비명을 지릅니다.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런데도 참가자의 65%는 끝까지 버튼을 눌렀습니다. 최고 전압까지. 그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요.

이 실험을 설계한 스탠리 밀그램은 원래 다른 결과를 기대했습니다. 나치 전범들의 재판을 지켜보며, 그는 “독일인은 원래 복종적인 민족성을 가졌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미국인과 비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뉴헤이븐에서 나온 결과가 베를린에서 나올 결과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미국 시민들도, 평범한 독일 시민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은 인류가 수천 년간 붙잡고 있던 질문 앞에 다시 우리를 세웁니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동양에서는 맹자와 순자가 논쟁했고, 서양에서는 홉스와 루소가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진화생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실험실에서 그 답을 찾고 있습니다.

왜 이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가

얼핏 보면 이상한 질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데, 굳이 인간 전체를 하나로 규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이 질문이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대로 정치 체제의 설계도가 됩니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고 믿는 사람은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려 합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놔두면 알아서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본래 악하다고 믿는 사람은 강력한 법과 통제 장치를 원합니다. 감시하지 않으면 사회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육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한다는 교육관과, 엄격하게 규율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육관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서로 다른 답에서 출발합니다. 경제 정책, 형사 사법 체계, 심지어 회사의 인사 관리 방식까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이미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맹자의 답: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

기원전 4세기, 중국의 사상가 맹자는 아주 구체적인 장면을 하나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걷다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순간을 목격한다고 상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떠오를까요.

맹자는 단언합니다. 누구든 그 순간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저절로 솟아난다고. 그 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쌓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싫어서도 아닙니다. 계산이 끼어들 틈도 없이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이 감정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 부르고, 이것이 인간이 타고난 선함의 증거라고 봤습니다.

맹자에게 인간의 본성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이 선을 향하는 것도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다만 물길을 막으면 물이 위로 튀어 오를 수도 있듯, 인간도 환경에 따라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본성이 왜곡된 결과라고 맹자는 설명합니다.

순자의 반박: 배고픈 아이들 사이의 마지막 빵

그런데 같은 시대, 같은 유가 사상 안에서 정반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순자입니다. 그는 맹자보다 한 세대쯤 뒤에 활동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로 인간의 마음이 저절로 선을 향한다면, 왜 굳이 예법과 교육이 필요한가.

순자가 관찰한 인간은 다릅니다. 배가 고프면 배부르고 싶어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고 싶어 하며, 지치면 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타고난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성을 그대로 따라가면 다툼이 생깁니다. 형제가 하나 남은 빵을 두고 다투는 것도, 이웃끼리 땅의 경계를 두고 싸우는 것도 전부 이 본성 때문이라고 순자는 말합니다.

순자에게 선함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목수가 굽은 나무를 곧게 펴는 과정에 비유합니다. 나무는 원래 굽어 있습니다. 하지만 도지개라는 도구로 오랜 시간 다듬으면 곧은 재목이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타고난 그대로는 다투고 빼앗는 존재이지만, 예법과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선한 존재로 다듬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교육받아야 하고, 수양해야 한다는 것. 다만 맹자는 원래 있던 선한 싹을 잘 키워야 한다고 말했고, 순자는 원래 없던 선함을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서양의 답: 자연 상태라는 사고 실험

동양에서 맹자와 순자가 논쟁하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17세기와 18세기 유럽에서도 철학자들은 “국가도 법도 없던 원시 상태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사고 실험을 벌였습니다.

토머스 홉스는 잉글랜드 내전의 참상을 직접 겪은 인물입니다. 그가 그린 자연 상태는 참혹합니다. 법도 없고 심판자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부족한 자원을 두고 끊임없이 경쟁합니다. 홉스는 이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불렀고, 그런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험악하고 잔인하며 짧다”고 묘사했습니다. 홉스에게 국가란 이 지옥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일부 포기하고 만든 필요악입니다. 강력한 통치자, 즉 리바이어던이 없다면 인간은 서로를 파괴할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입니다.

반면 장자크 루소는 정반대의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상상한 자연 상태의 인간은 숲속을 자유롭게 거닐며 필요한 만큼만 취하고, 남는 것에 욕심내지 않는 존재입니다. 루소에게 인간을 타락시킨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문명입니다. 누군가 땅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선언한 순간부터 불평등과 다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의 유명한 주장입니다. 루소는 이렇게 씁니다. 문명이 인간을 사슬에 묶었다고. 그에게 국가와 사회 제도는 자연스러운 선함을 억압하는 장치일 수 있습니다.

같은 질문, 같은 시대의 유럽인데도 두 사람의 결론은 정반대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요. 두 사람이 실제로 자연 상태를 관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홉스도 루소도 원시 인류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살던 시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을 역으로 추론했을 뿐입니다. 홉스는 내전을 겪었고, 루소는 궁정 사회의 위선과 불평등에 신물을 냈습니다.

네 가지 관점

사상가시대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사회 제도의 역할
맹자기원전 4세기, 중국본래 선함(성선설), 측은지심을 타고남타고난 선함을 지키고 키우는 것
순자기원전 3세기, 중국본래 악함(성악설), 욕망을 타고남굽은 본성을 예법으로 바로잡는 것
홉스17세기, 영국자연 상태는 투쟁 상태폭력을 억제하는 강력한 통치 장치
루소18세기, 프랑스자연 상태는 순수한 상태자연스러운 선함을 억압하는 장치일 수 있음

현대 과학은 뭐라고 말하는가

철학자들이 사고 실험으로 답을 찾던 질문에, 오늘날 과학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실험실에서, 그리고 아기들을 관찰하며 직접 데이터를 모으는 것입니다.

예일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폴 블룸 연구팀은 생후 6개월에서 10개월 된 아기들에게 인형극을 보여주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인형은 언덕을 오르려는 다른 인형을 도와주고, 다른 인형은 방해합니다. 실험이 끝난 뒤 아기들에게 두 인형 중 하나를 고르게 하면, 압도적 다수가 도와준 인형을 선택했습니다. 아직 말도 못 하고, 부모에게 도덕을 배울 시간도 없었던 아기들이 벌써 선함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는 맹자의 손을 들어주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진화생물학자들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합니다. 인간이 협력하는 이유가 순수한 선함 때문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부족 단위로 살던 초기 인류에게 협력은 생존 확률을 높이는 전략이었습니다. 혼자서는 매머드를 사냥할 수 없지만, 여럿이 힘을 합치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협력하지 않는 개체, 즉 무임승차자를 처벌하고 배척하는 성향도 함께 진화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선하다고 느끼는 행동들, 나눔이나 협력이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도덕 그 자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진화가 남겨놓은 도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밀그램의 실험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밀그램의 결론은 인간이 본래 악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평범한 사람도 권위 앞에서, 그리고 자신이 최종 책임자가 아니라는 착각 속에서 잔혹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선악은 개인의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크게 흔들리는 무언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맹자와 순자, 홉스와 루소가 놓쳤을지도 모르는 세 번째 답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둘 다 될 수 있는 존재라는 답입니다.

각 이론의 한계

맹자의 성선설은 아름답지만 한 가지 질문에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전쟁과 학살, 잔혹한 범죄는 어디서 오는가. 맹자는 이를 환경의 왜곡이라 설명하지만, 인류 역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의 규모를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따라붙습니다.

순자의 성악설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인간이 본래 다투고 빼앗는 존재라면, 왜 낯선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물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는가. 아무 대가 없이 헌혈하고 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홉스의 자연 상태론은 인류학적 증거와 자주 충돌합니다. 실제로 발견된 수렵채집 사회들을 연구해보면, 홉스가 그린 것처럼 끝없는 전쟁 상태였던 경우보다 오히려 협력과 자원 공유가 정교하게 발달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루소의 순수한 자연인 개념 역시 비판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문자 기록이 없던 시대의 인간 사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루소 스스로도 이것이 실제 역사가 아니라 논증을 위한 가정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 이 질문이 갖는 의미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 살아 있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두고도 이 논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직원을 믿고 자율성을 주는 것이 성과를 끌어낸다는 경영 철학은 맹자와 루소 쪽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촘촘한 규정과 감시 체계로 관리해야 한다는 철학은 순자와 홉스 쪽에 가깝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각국 정부가 봉쇄 정책을 두고 벌인 논쟁도 비슷한 구조였습니다. 시민들에게 정보를 주고 자율적으로 협조할 것을 기대하는 방식과, 강력한 처벌과 통제로 이동을 제한하는 방식 사이의 선택은 결국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는 오래된 질문의 현대판이었습니다.

소셜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악플 현상 역시 이 질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다가, 익명이라는 가림막 뒤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돌변하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이는 인간이 고정된 선악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조건과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현대적 관찰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핵심 요약

  • 맹자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측은지심을 갖고 있다고 보았고, 순자는 인간의 본성이 욕망이며 교육으로 다듬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 홉스는 국가 없는 자연 상태를 투쟁의 상태로, 루소는 순수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그렸습니다.
  • 현대 발달심리학의 아기 실험은 선함에 대한 선호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진화생물학은 협력과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 생존 전략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 밀그램의 실험은 평범한 사람도 특정 상황과 권위 앞에서 잔혹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선악이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맥락에 따라 흔들리는 것일 수 있다는 세 번째 관점을 열어줍니다.

오늘의 한 문장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를 묻기 전에, 어떤 상황이 인간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만드는지를 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쪽이 과학적으로 더 맞나요? 어느 한쪽이 완전히 맞다고 증명되지는 않았습니다. 발달심리학 실험은 선함에 대한 선호가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진화생물학은 그 선함조차 생존 전략의 산물일 수 있다고 봅니다. 두 관점 모두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Q2. 맹자와 순자는 실제로 만난 적이 있나요?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순자는 맹자보다 약 백 년 정도 뒤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맹자의 사상을 글을 통해 접하고 반박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Q3. 밀그램의 실험은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나요? 현재 기준의 연구 윤리로는 원래 형태 그대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참가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고통을 줄 수 있다는 문제 때문에, 오늘날에는 축소되거나 변형된 형태로만 유사한 연구가 이루어집니다.

Q4. 홉스와 루소 중 누구의 이론이 실제 역사와 더 가깝나요?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둘 다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실제 수렵채집 사회는 홉스가 그린 것처럼 끝없는 전쟁 상태도 아니었고, 루소가 그린 것처럼 완전히 평화롭지도 않았습니다. 협력과 갈등이 공존하는 훨씬 복잡한 모습이었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입니다.

Q5. 이 논쟁이 지금 우리 삶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교육 방식, 회사의 관리 체계, 법과 처벌 제도, 심지어 정부의 정책 설계까지,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이 오래된 질문은 여전히 현실의 제도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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