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인의 유산

페니키아인은 무엇을 남겼을까?

기원전 600년 무렵,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 2세는 한 무리의 선원들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홍해에서 배를 띄워 아프리카 대륙을 통째로 돌아 지중해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원들은 명령대로 남쪽 바다를 따라 내려갔고, 곡식을 심고 거둘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해안에 배를 대고 몇 달씩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흐른 뒤, 배는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지중해로 돌아왔습니다.

훗날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항해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는 믿었지만, 선원들이 전한 한 가지 세부 사항만큼은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남쪽을 돌아 서쪽으로 항해할 때, 해가 오른쪽, 그러니까 북쪽에서 떴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리스인이 알던 세계에서 태양은 언제나 남쪽 하늘에 떠 있어야 했습니다. 헤로도토스는 이 부분만큼은 거짓이라고 단정 지으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항해를 해낸 사람들이 바로 페니키아인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보고서

헤로도토스가 믿지 못했던 그 문장은, 지금 우리 눈으로 보면 오히려 이 항해가 실제로 일어났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읽힙니다.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적도 아래로 내려간 뒤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리면, 정오의 해는 정말로 북쪽 하늘, 그러니까 항해자의 오른쪽에 나타납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남반구라는 개념도 알지 못했던 기원전 6세기의 지중해 사람이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 디테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 항해 자체를 완전히 사실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집트 쪽에도, 페니키아 쪽에도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우리가 가진 것은 백오십 년 뒤 그리스인이 전해 들은 이야기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많은 역사가들은 당사자조차 믿지 못했던 그 사소한 관찰 하나가, 진짜로 그곳까지 다녀온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이라고 봅니다.

흥미로운 점은, 페니키아인 스스로는 이 위업에 대해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민족의 문헌 속에서만 전해집니다.

이 배를 몰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페니키아는 하나의 나라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중심으로 비블로스, 시돈, 티레, 아르와드 같은 항구 도시들이 저마다 독립된 왕과 신전을 두고 있었을 뿐, 이들을 하나로 묶는 왕국이나 국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페니키아인’이 아니라 ‘티레 사람’, ‘시돈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이 도시들이 지중해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한 시기는 기원전 1200년 무렵 있었던 대규모 붕괴와 맞물립니다. 이집트, 히타이트, 미케네 그리스가 거의 동시에 힘을 잃으면서 지중해 동부에는 큰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메운 것이 배를 잘 다루던 레바논 해안의 상인들이었습니다. 뒤에 남을 제국도, 지켜야 할 넓은 영토도 없었던 이 도시들은 오히려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대신 바다 위에 항로를 놓았습니다.

그리스인이 붙여준 이름

‘페니키아’라는 이름조차 자신들이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어 ‘포이닉스’에서 왔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데, 이 단어는 자주색 또는 붉은색을 뜻합니다. 학계에서 완전히 합의된 어원은 아니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특산품과 무관하지 않다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입니다.

그 특산품은 바로 티레의 자주색 염료였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사는 뿔소라, 학명으로 뮤렉스라 불리는 조개의 분비샘에서 극소량의 액체를 뽑아내 만드는 이 염료는, 옷감 1그램을 물들이는 데 조개 수천 마리가 필요할 만큼 값비쌌습니다. 원료를 얻는 과정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생산지 주민들은 코를 막고 살아야 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그럼에도 이 색은 곧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 원로원 의원의 토가에 둘린 자주색 띠도, 비잔티움 황제를 가리키던 ‘자주색 방에서 태어난 자’라는 표현도 모두 이 조개에서 시작된 색이었습니다.

상인이 만든 문자

페니키아인이 남긴 것 가운데 가장 크게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문자입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는 수백 개의 기호를 익혀야 했고, 이를 다루는 일은 오랜 훈련을 거친 서기관 계급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페니키아인은 기원전 1000년 무렵, 비블로스의 아히람 석관 명문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자음 스물두 개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표기 체계를 다듬어냈습니다. 상인이 배 위에서 화물 목록을 적고 거래를 기록하는 데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배가 항구마다 닿을 때 이 문자도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기원전 800년 무렵 그리스인들이 이 체계를 받아들이면서, 자음만 있던 페니키아 문자에 모음을 더해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의 알파벳을 완성했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글자 이름 속에 남아 있습니다.

페니키아 문자 (원래 뜻)그리스 문자현재 알파벳
알레프 (황소)알파A
베트 (집)베타B
기멜 (낙타)감마C, G
달레트 (문)델타D

지금 이 문장을 읽고 있는 독자가 눈으로 훑는 글자 하나하나에는, 삼천 년 전 레바논 해안 상인들이 붙인 이름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입니다.

지중해에 뿌려진 항구들

페니키아 상인들은 자국 영토를 넓히는 대신 무역 거점을 지중해 곳곳에 심었습니다. 키프로스, 시칠리아, 사르데냐, 몰타를 거쳐 북아프리카 해안, 그리고 지브롤터 해협 너머 스페인 남부까지 항로가 이어졌습니다. 지금의 카디스 자리에 세워진 가디르라는 정착지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1100년 무렵 건설되었다고 전해지며,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도록 사람이 살아온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다만 이 연대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근거는 전설만큼 확고하지는 않습니다.

이 항로를 타고 오간 것은 자주색 염료와 레바논산 백향목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리 제품, 금속, 직물이 함께 실려 다녔고, 성서에 등장하는 솔로몬 성전의 목재도 티레에서 공급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주석처럼 지중해 안에서 구하기 힘든 금속을 찾아 브리튼 섬 인근까지 항로를 넓혔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티레가 낳은 도시, 카르타고

이 무역망 위에 세워진 가장 큰 성취는 카르타고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티레의 공주 엘리사, 훗날 로마 문학에서 디도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 정치적 다툼을 피해 배를 타고 북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해 기원전 814년 무렵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합니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속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훨씬 후대에 로마인의 손으로 덧붙여진 것이지만, 티레 출신 이주민들이 세운 식민 도시라는 뼈대만큼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카르타고는 곧 어머니 도시 티레를 뛰어넘었습니다. 서지중해 무역을 사실상 장악하며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국가로 성장했고, 새롭게 떠오르던 로마와 부딪히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한니발, 그리고 사라진 목소리

기원전 264년부터 146년까지 백여 년에 걸쳐 로마와 카르타고는 세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의 이름, 포에니 전쟁은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라틴어 ‘포에니’에서 왔습니다. 2차 전쟁에서 한니발 바르카는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했고,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에 참혹한 패배를 안겼습니다. 로마는 무너지기 직전까지 몰렸지만 끝내 버텨냈고, 결국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3차 전쟁의 끝은 협상이 아니라 절멸이었습니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완전히 불태우고 주민 대부분을 죽이거나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흔히 따라붙는 이야기, 로마가 밭에 소금을 뿌려 다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했다는 전설은 사실 어떤 고대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훨씬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이며, 실제 고대 기록이 전하는 것은 도시의 완전한 파괴와 주민들의 비참한 운명뿐입니다.

정작 눈여겨볼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도서관과 기록 대부분을 불태우면서도, 카르타고 장군 마고가 남긴 스물여덟 권짜리 농업서만큼은 예외로 두었습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하라는 명령을 따로 내렸고, 그 덕분에 이 책의 일부 내용은 훗날 콜루멜라와 대(大) 플리니우스 같은 로마 저술가들의 인용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카르타고가 남긴 문헌 가운데 상당한 분량이 온전히 전해지는 사례는 사실상 이것이 유일합니다.

무덤 속의 논쟁

카르타고 유적에서는 ‘토페트’라 불리는 구역이 여럿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화장된 어린아이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 수천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나 플루타르코스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 저술가들은 이곳을 두고 카르타고인들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바알 하몬과 타니트 신에게 아이를 제물로 바친 흔적이라고 기록했습니다.

현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갈립니다. 일부 학자는 고대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제 제의적 희생의 증거로 봅니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유해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다수가 자연사했거나 사산된 아이들로 추정된다는 점을 근거로, 이곳이 단지 어린 자녀를 위한 별도의 매장지였을 뿐이며 적대 관계였던 그리스·로마 저술가들이 카르타고를 야만적으로 그리기 위해 과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이 논쟁은 아직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결론 나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것과 남은 것

페니키아 도시들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티레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함락되었고, 카르타고는 그로부터 백여 년 뒤 로마의 손에 완전히 지워졌습니다.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적혔을 그들의 기록은 지중해의 습한 기후 속에서 대부분 삭아 없어졌고, 두 차례의 도시 파괴는 남은 자료마저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페니키아인에 대해 아는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성서 기록자의 시선을 통해서입니다.

세상에 읽고 쓰는 도구를 퍼뜨린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후대에 직접 전할 수는 없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흔적은 곳곳에 남았습니다. 오늘날 사용되는 알파벳 계열 문자 체계 대부분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페니키아 문자에 닿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리스와 라틴,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키릴 문자 계열은 물론, 아람 문자를 거쳐 갈라져 나간 히브리 문자와 아랍 문자 계열까지 포함하면 지구상 절반 이상의 인구가 매일 이 뿌리에서 갈라진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카디스라는 도시는 지금도 스페인 남부에 남아 사람이 살고 있고, 2000년대에 이루어진 한 유전학 연구에서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 남성들에게서 페니키아계로 추정되는 유전자 표지가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 선원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그들은 왕 앞에서 자신들이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을 뿐이었습니다. 해가 오른쪽에서 떴다는 그 한마디는 당대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음은 이천 년도 더 지난 뒤에야 증명되었습니다. 다만 그 사실을 증명해 줄 페니키아인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페니키아는 지금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나요?

지금의 레바논 해안 지역이 중심이었으며, 시리아와 이스라엘 북부 해안 일부까지 포함됩니다. 비블로스, 시돈, 티레, 아르와드가 대표적인 도시국가였습니다.

페니키아 문자와 지금 우리가 쓰는 알파벳은 실제로 연결되어 있나요?

그렇습니다. 기원전 800년 무렵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의 자음 문자 체계를 받아들여 모음을 더했고, 이것이 라틴 문자와 키릴 문자로 이어졌습니다. 알파벳이라는 단어 자체도 페니키아 문자 이름인 알레프와 베트에서 왔습니다.

카르타고와 페니키아는 같은 나라였나요?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본토 도시 티레의 이주민들이 북아프리카에 세운 식민 도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카르타고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오히려 티레보다 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을 가리켜 ‘포에니’, 즉 페니키아인이라 불렀습니다.

“포에니 전쟁”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요?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포에니’에서 왔습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벌인 세 차례 전쟁을 로마인의 관점에서 부른 이름입니다.

로마가 카르타고 땅에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사실인가요?

이 이야기는 어떤 고대 문헌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후대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이야기로 보입니다. 실제 고대 기록이 전하는 것은 기원전 146년 로마군이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다는 내용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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