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메르는 무엇을 최초로 발명했을까?
기원전 1750년,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우르. 난니라는 이름의 남자가 구리 상인 에아나시르에게 점토판 한 장을 보낸다. 내용은 간단하다. 좋은 구리를 보내주기로 약속해놓고 형편없는 물건을 보냈다는 것, 심부름꾼을 위험한 길로 여러 번 오가게 하면서도 무례하게 대했다는 것. “나에게 이런 걸 보내다니,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요.” 점토판은 이런 식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이 점토판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2010년대 이후에는 인터넷에서 밈이 되어 사람들이 가상의 후기 사이트에 에아나시르에게 장난스러운 항의 댓글을 남기는 놀이로까지 번졌다. 3,800년 전 사람의 분노가 오늘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이 편지가 그 시대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은 훨씬 더 오래된 사건의 결과물이다. 이 편지가 쓰인 것은 우르라는 도시가 이미 수메르 문명의 심장이었던 시절로부터 천 년도 더 지난 뒤였고, 쐐기 모양의 글자를 젖은 진흙에 눌러 뜻을 전달하는 방법 자체는 그보다 훨씬 이전,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어느 수메르인의 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발명 하나가 없었다면 난니의 분노도, 법도, 학교도, 시인의 이름도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메르가 만든 것은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전달하고 그것을 시간 너머로 넘기는 방법 그 자체였다.
셈하기 위해 태어난 글자
문자는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기원전 3400년 무렵 우루크라는 도시의 신전에서, 사람들은 곡식과 가축과 항아리의 숫자를 기억할 방법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작은 진흙 토큰을 만들어 양이나 보리 한 자루를 하나의 토큰으로 표시했고, 그 토큰들을 다시 속이 빈 진흙 공 안에 넣어 봉인했다. 문제는 봉인한 뒤에는 안에 몇 개가 들었는지 확인하려면 공을 깨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을 깨기 전에, 안에 든 토큰의 모양과 개수를 겉면에 눌러 찍어두기 시작했다.
이 겉면의 자국이 점점 단순해지고 표준화되면서, 실제 토큰이 없어도 겉면의 그림만으로 뜻이 통하게 되었다. 양 한 마리를 뜻하는 그림, 보리 한 자루를 뜻하는 그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이 소리를 나타내기 시작하자 비로소 문자라 부를 만한 체계가 등장했다. 오늘날 학자들이 쐐기문자라 부르는 이 체계는 그렇게 회계 장부에서 태어나 서서히 법과 문학과 개인의 감정까지 담아내는 도구로 자라났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 문자를 만든 목적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신전 창고에 보리가 몇 자루 들어왔는지, 누가 양을 몇 마리 빌려 갔는지를 정확히 기록해 분쟁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인류 최초의 문서는 시도, 노래도, 왕의 업적도 아니었다. 곡물 출납부였다.
숫자를 세는 방식에서도 수메르인은 독특한 선택을 했다. 10이나 12가 아니라 60을 기준으로 삼는 60진법을 사용한 것이다. 60은 2, 3, 4, 5, 6, 10, 12, 15, 20, 30으로 모두 나누어떨어지는 편리한 수였고, 이 선택은 지금도 우리 손목시계 안에 살아 있다. 한 시간이 60분이고 한 분이 60초인 것, 원을 360도로 나누는 것 모두 수메르인의 계산법에서 이어진 습관이다.
아버지가 선생님에게 술을 대접한 이유
문자가 회계를 위해 태어났다면, 그 문자를 다룰 사람을 길러내는 곳도 필요했다. 수메르의 학교, 에두바는 “점토판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이곳의 교장은 움미아, 즉 스승이라 불렸고, 그 밑에는 교재를 관리하는 선생,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 수메르어를 전담하는 선생,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채찍을 든 사람”이 있었다.
수메르 연구의 권위자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가 발굴하고 번역한 점토판 가운데는, 한 학생이 학교생활을 하루 단위로 적은 글이 있다. 지각을 하고, 글씨가 단정치 않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함부로 일어났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사소한 잘못으로 학생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매를 맞는다. 지친 학생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하고, 아버지는 뜻밖의 해법을 찾는다.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선물하고 술을 대접한 것이다. 접대를 받은 선생님은 그제야 학생을 칭찬하며 앞으로 잘 되길 빌어준다.
이 짧은 이야기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는 4천 년 전에 이미 체계적인 학교와 커리큘럼, 시험과 체벌이 존재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때도 이미 부모가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건네 자녀의 처지를 나아지게 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제도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 제도를 살짝 비껴가려는 인간의 시도가 함께 있었다.
왕보다 먼저 있었던 법
법에 관한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은 함무라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알려진 그 법전은 기원전 1750년경 바빌론에서 반포되었다. 하지만 이 법전이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오래된 통념은 사실이 아니다.
1952년, 니푸르에서 발굴된 점토판 조각을 크레이머가 번역하면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르 제3왕조를 세운 우르남무 왕이 기원전 2100년에서 2050년 사이에 이미 문서 형식을 갖춘 법전을 만들었다. 함무라비보다 3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게다가 두 법전은 처벌의 원칙 자체가 달랐다. 함무라비 법전이 신체적 해를 입힌 사람에게 같은 방식의 신체적 처벌을 되돌려주는 동해보복의 원칙을 따른 반면, 우르남무 법전은 상해를 입혔더라도 은으로 배상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다. 몸이 아니라 재산으로 갚게 한 것이다. 서문과 조항, 결론으로 이어지는 법전의 형식,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면, 이러이러하게 처벌한다”는 문장 구조 자체도 우르남무 법전에서 처음 자리를 잡았고, 이후의 모든 메소포타미아 법전이 이 틀을 따랐다.
우르남무 법전보다 더 오래된 라가시의 우루카기나 왕의 개혁 문서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원본 자체는 사라졌고 다른 문헌 속 언급으로만 전해진다. 그래서 지금까지 실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라는 자리는 여전히 우르남무의 것이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람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지은 사람들의 이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그리스 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호메로스조차 실존 여부가 논쟁거리다. 그런데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을 남긴 최초의 인물은, 놀랍게도 시인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한 여성 제사장이었다.
엔헤두안나는 기원전 23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아카드 제국의 창시자 사르곤 왕의 딸이었다. 사르곤은 종교의 중심지였던 우르를 정치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딸을 달의 신 난나를 섬기는 대제사장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엔헤두안나는 단순히 의례를 주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채 여신 인안나를 향한 찬가를 여러 편 지었다. 그의 작품은 수메르어로 쓰였고, 신에게 바치는 찬양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감정과 위기, 정치적 곤경까지 1인칭으로 담아낸 것이 특징이다. 한때 우르에서 쫓겨나는 위기를 겪었을 때, 그는 자신의 두려움과 억울함을 여신에게 직접 토로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작품의 언어와 문법이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후대의 것이라는 점에서 후대에 다듬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 원반과 인장이 실제로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름을 남긴 최초의 저자라는 자리는 지금도 그의 몫으로 남아 있다.
바퀴, 맥주, 그리고 남겨진 흔적들
수메르가 세상에 남긴 최초의 것들은 이 밖에도 많다. 다만 모든 항목이 우르남무 법전이나 엔헤두안나만큼 확실하지는 않다.
바퀴가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바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왔고, 초기 형태는 옮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릇을 빚기 위한 물레였다는 설명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통나무 원판을 그대로 쓰던 초기 형태에서, 세 조각의 두꺼운 판자를 맞춰 구리못으로 고정한 형태로 발전했고, 이것이 축에 끼워져 최초의 수레바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동유럽의 카르파티아 지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바퀴가 등장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어, 어느 한쪽이 유일한 발상지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바퀴 사용은 그림문자를 통해 추정될 뿐, 실물 바퀴 자체가 발견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신중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다.
맥주도 자주 언급되는 항목이다. 수메르인들은 맥주의 여신 닌카시를 향한 찬가를 남겼는데, 이 찬가 속에 맥아를 만들고 발효시키는 과정이 노래 형식으로 담겨 있어 후대 학자들이 여기서 고대의 양조법을 재구성하기도 했다. 맥주는 단순한 기호품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배급품이자 일종의 화폐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항목들의 공통점은, 수메르가 “최초로 발명했다”는 표현보다 “가장 먼저 기록으로 남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의 발명은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수메르가 특별한 이유는 세상에 없던 것을 전부 처음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습관을 처음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진흙에 새겨진 것들이 남긴 것
에아나시르에게 화를 낸 난니의 편지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편지가 3,800년을 건너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누군가 진흙판 위에 감정을 새기고 그것을 불에 굽거나 햇볕에 말려 두었기 때문이다. 종이였다면 진작 삭아 없어졌을 것이다. 목소리였다면 그 순간 사라졌을 것이다.
수메르인이 회계 장부를 적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결국 법을 적는 방법이 되었고 시를 적는 방법이 되었고 학생의 하루를 적는 방법이 되었고 마침내 상인에게 화가 난 한 고객의 목소리를 적는 방법이 되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전달하고 그것을 시간 너머로 넘기려는 마음, 그것이 진흙 한 조각 위에 남았을 뿐이다.
자주 묻는 질문
수메르 문명은 지금의 어느 지역에 있었나요?
수메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오늘날 이라크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번성했다. 우루크, 우르, 니푸르, 라가시 같은 도시국가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메르인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가요?
수메르어는 주변의 셈어족이나 인도유럽어족과 뚜렷한 연관성이 확인되지 않는 언어로, 학계에서는 이를 계통이 밝혀지지 않은 고립어로 분류한다. 수메르인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 가설이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결론은 없다.
쐐기문자는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나요?
가장 이른 형태는 기원전 3400년에서 3200년 사이, 우루크에서 신전 창고의 물품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처음에는 그림에 가까웠고,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 체계로 발전했다.
함무라비 법전이 최초의 법전 아닌가요?
가장 널리 알려진 법전이지만 최초는 아니다. 우르남무가 기원전 2100년에서 2050년 사이에 만든 법전이 함무라비보다 300년 이상 앞서며, 현재까지 발견된 성문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는다.
에아나시르 점토판은 수메르 시대의 문서인가요?
정확히는 아니다. 이 점토판은 기원전 1750년경, 수메르인이 정치적 주도권을 잃은 지 한참 뒤인 고바빌로니아 시대에 아카드어로 작성되었다. 다만 이 편지를 적는 데 쓰인 쐐기문자라는 도구 자체는 천 년도 더 전에 수메르인이 만들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