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의 시작

청동기 시대는 왜 인류를 바꾸었을까?

1982년 여름, 튀르키예 남서부 해안 마을 카쉬 인근에서 해면을 채취하던 잠수부 메흐메트 차크르는 수심 44미터 바닷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금속 덩어리들을 발견했습니다. 둥글넓적한 모양이 마치 짐승 가죽을 펼쳐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훗날 고고학자들은 이 물건에 ‘옥스하이드 잉곳(oxhide ingot, 소가죽 모양 주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가 신고한 이 좌표에서,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발굴 끝에 인류가 찾아낸 것은 단순한 난파선이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1300년경 가라앉은 이 배 한 척에서는 키프로스산 구리, 중앙아시아산 주석, 이집트의 황금과 상아, 레바논의 백향목, 발트해 연안의 호박까지 나왔습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둔 여러 문명이 이미 하나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구리는 지중해 곳곳에서 캘 수 있는 흔한 금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위험한 항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대륙에서 자원을 실어 날랐을까요. 답은 배 밑바닥에 함께 실려 있던, 얼핏 보면 하찮아 보이는 또 다른 금속에 있습니다. 바로 주석입니다. 이 질문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가 왜 돌을 버리고 금속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떻게 국가와 전쟁과 문자까지 만들어 냈는지가 차례로 드러납니다.

구리만으로는 부족했다

인류가 구리를 다루기 시작한 것 자체는 청동기 시대보다 한참 이릅니다.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고원의 차외뉘 유적에서는 기원전 7200년경으로 추정되는 구리 장신구가 나왔고,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여러 유적에서도 신석기 시대부터 순수한 구리로 만든 소품이 발견됩니다. 문제는 순동, 즉 다른 금속을 섞지 않은 구리가 생각보다 무른 금속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도끼나 칼로 만들어도 몇 번 내려치면 날이 휘어 버렸습니다. 장신구로는 훌륭했지만, 무기나 농기구로는 돌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선 발견이 바로 합금이었습니다. 구리에 주석을 적정 비율로 섞으면, 두 금속 각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잘 부러지지 않는 새로운 금속이 만들어집니다. 일반적으로 구리 약 90퍼센트에 주석 약 10퍼센트를 섞은 것을 청동이라 부릅니다. 녹는점도 순수한 구리보다 낮아져서 다루기가 한결 쉬워졌습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배합 비율 하나가, 도구의 역사를 완전히 다른 궤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지리적 우연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듭니다. 구리 광석은 지중해와 서아시아 곳곳에 비교적 흔했지만, 주석 광석은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주석은 어디에 있었을까

구리가 나는 곳에 주석도 함께 나면 좋았겠지만, 지구의 지질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후기 청동기 시대 지중해 세계에서 구리는 주로 키프로스섬에서 대량으로 공급되었습니다. 반면 주석 광맥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일대를 비롯한 중앙아시아나, 유럽 서쪽 끝 콘월 지방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 드물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청동을 만들고 싶은 문명은 거의 예외 없이 이 희귀한 자원을 구하기 위해 국경 너머로 손을 뻗어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국내에는 주석 산지가 거의 없어서, 청동기 시대 한반도 사람들은 중국 북방이나 양쯔강 이남 지역과의 교역을 통해 원료를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6년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유적에서 출토되어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으로 기원전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청동 장신구는, 그 교역망이 한반도까지 뻗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현재까지의 가장 이른 물증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지점에서 청동기 시대는 이전의 어떤 시대와도 다른 성격을 띠게 됩니다. 돌은 대개 자기 땅에서, 늦어도 이웃 부족과의 거래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동은 처음부터 국경을 넘지 않고는 만들 수 없는 재료였습니다.

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화물

다시 울루부룬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배에 실려 있던 소가죽 모양 구리 주괴는 무려 10톤 가까이 되었고, 여기에 주석 주괴 1톤가량이 함께 실려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배 한 척의 화물만으로 청동 무기 300자루 이상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산합니다. 그런데 화물 목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 이집트의 흑단과 상아, 발트해에서 온 호박 구슬, 심지어 악기와 서판까지 실려 있었습니다.

이 배 한 척이 보여 주는 것은, 후기 청동기 시대 지중해 동부가 이미 여러 나라의 물자와 사람이 오가는 하나의 경제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집트, 히타이트, 미케네, 키프로스, 가나안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청동이라는 단 하나의 전략 물자를 매개로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셈입니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청동은 그 시대의 원유이자 반도체였습니다.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의 격차를 벌리고, 없으면 안 되지만 스스로는 만들 수 없는 나라들을 국제 무역이라는 사슬로 묶어 놓은 자원이었습니다.

청동을 쥔 자, 사람을 부리다

청동이 가져온 변화는 무역로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는 일찍이, 청동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고도의 전문 기술이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사회 구조를 만들어 냈다고 지적했습니다.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하고, 정확한 비율로 주석을 섞고, 적절한 온도로 가열해 주형에 붓는 일련의 과정은 아무나 짬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오직 이 일에만 매달리는 전업 장인이 필요한 작업이었습니다.

이 장인들을 먹여 살리려면 누군가 잉여 곡물을 대야 했고, 원료가 되는 구리와 주석을 먼 곳에서 들여오려면 그만한 재화와 조직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자연히 이 흐름을 통제하는 소수의 사람들, 즉 원료 수입로와 장인 집단을 함께 거느린 지배층이 생겨났습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을 발굴하면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에는 화려한 청동 검과 거울, 장신구가 가득한 반면, 같은 시대 평범한 사람의 무덤은 부장품이 거의 없거나 소박한 토기 몇 점에 그칩니다. 뼈를 분석해 보면 영양 상태의 격차도 이전 신석기 시대보다 뚜렷하게 벌어져 있습니다. 청동이라는 금속 하나가, 눈에 보이는 계급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셈입니다.

곡괭이 대신 칼끝을 겨누다

권력을 쥔 이들에게 청동은 또 하나의 쓸모가 있었습니다. 바로 무기입니다. 돌로 만든 창과 도끼로 싸우던 시대에서, 예리하게 벼릴 수 있고 부러지지 않는 청동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시대로 넘어가면서 전쟁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이제 전투는 소규모 부족 간의 다툼을 넘어, 자원과 교역로를 지키기 위한 국가 단위의 군사 행동으로 커졌습니다. 기원전 1274년경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제국이 시리아의 카데시에서 맞붙은 전투는, 양측 모두 수천 대의 전차와 청동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동시에 청동 무기와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능력 자체가 곧 국력이 되었습니다. 주석 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일수록 교역로를 지키는 일에 사활을 걸어야 했고, 이는 다시 상비군과 관료 조직의 필요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무기가 사회를 지키는 수단이자, 동시에 그 사회를 유지하는 자원 확보 경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곡물 자루를 세던 손이 기호를 만들다

자원과 인력을 이만큼 조직적으로 움직이려면 누가 얼마나 가졌고,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나누어 주었는지 정확히 기록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초기 점토판 문서 상당수가 시나 문학이 아니라 곡물과 가축, 금속의 수량을 적어 놓은 행정 기록이라는 사실은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청동 원료의 수입과 분배, 완제품의 배급을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이, 결과적으로 기호와 문자 체계가 정교해지는 데 실질적인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 고고학계의 널리 받아들여지는 해석입니다. 자원을 관리하려는 필요가 앞서고, 그것을 표현할 기록 수단이 뒤따라 발달한 셈입니다.

청동기 시대에도 대부분의 도구는 돌이었다

여기서 흔히 오해하기 쉬운 부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라는 이름 때문에 마치 그 시대 사람들의 모든 도구가 청동으로 바뀌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청동은 귀하고 값비싼 금속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무기나 제사용 도구, 지배층의 장신구에 집중적으로 쓰였습니다. 정작 밭을 갈고 곡식을 베는 일상적인 농사일에는 여전히 돌로 만든 반달 돌칼과 돌낫이 사용되었습니다. 실제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는 청동 농기구가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세형동검이나 다뉴세문경 같은 정교한 청동 유물은 소수 지배층의 무덤에서만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반면 구리와 주석이 상대적으로 풍부했던 중국 남부와 베트남 일부 지역에서는 청동 농기구가 실제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이 역시 지역마다 자원 사정에 따라 달라졌던 셈입니다.

‘청동기 시대’라는 이름 자체도 사실은 당대 사람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닙니다. 1836년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학예사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유물을 도구의 재질에 따라 돌, 청동, 철의 순서로 전시하면서 처음 제안한 분류법이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제자 옌스 야코브 보르사에가 지층 발굴을 통해 이 구분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석기·청동기·철기로 이어지는 ‘삼시대법’이 세계 고고학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다만 이 구분이 모든 지역에 똑같이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대부분은 청동기 단계를 거치지 않고 신석기에서 곧바로 철기로 넘어갔고, 신대륙에서는 이 구분법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톰센의 삼시대법은 편리한 분류 도구일 뿐, 인류 전체가 걸어간 하나의 정해진 길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시, 가라앉은 배로

울루부룬의 배는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했습니다. 폭풍 때문이었는지, 과적 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배가 싣고 있던 화물의 다양성은, 그 시절 지중해 동부가 얼마나 촘촘하고 광범위한 그물망으로 엮여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키프로스의 구리와 아프가니스탄의 주석이 만나 청동이 되고, 그 청동이 다시 권력과 전쟁과 문자를 낳는 동안, 이 그물망에 참여한 문명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깊이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자원의 결핍이 이토록 넓은 세계를 하나로 엮어 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인류 문명이 지나온 길의 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촘촘한 연결이, 훗날 이 문명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청동기 시대는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요?

지역마다 크게 다릅니다. 서아시아와 지중해 지역에서는 대략 기원전 3300년경부터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학계 내에서도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 무렵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별로 시작과 종료 시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Q2. 청동기 시대 이전에 ‘동기 시대'(순동기 시대)라는 것도 있나요?

일부 학자들은 신석기와 청동기 사이에 순수한 구리만 사용하던 동기 시대(copper age)를 별도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다만 순동만을 사용한 시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은 고대 이집트 등 세계적으로 한정되어 있어, 대개의 개설서에서는 이 단계를 생략하고 석기·청동기·철기의 삼시대법을 사용합니다.

Q3. 울루부룬 난파선은 어떻게 발견되었나요?

1982년 튀르키예 남서부 해안에서 해면을 채취하던 현지 잠수부가 바닷속에서 낯선 금속 덩어리를 발견해 신고하면서 알려졌습니다. 이후 미국과 튀르키예 고고학팀이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에 걸쳐 발굴했으며,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 난파선 가운데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사례로 꼽힙니다.

Q4. ‘청동기 시대’라는 이름은 누가 처음 만들었나요?

1836년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이 유물을 재질에 따라 분류하며 처음 제안했습니다. 이후 그의 제자 보르사에가 발굴을 통해 이 구분을 뒷받침하면서 석기·청동기·철기로 이어지는 삼시대법이 세계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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