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점심은 왜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을까?
1863년 5월 15일, 파리 샹젤리제의 산업궁 한쪽 별관에서는 이상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림 한 점 앞에 몰려들어 손가락질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이는 지팡이 끝으로 캔버스를 찌를 듯 다가섰다가 경비원에게 제지당했습니다. 부인들은 딸의 손을 잡아끌며 그 그림 쪽을 보지 못하게 시선을 돌렸고, 신문기자들은 조롱할 문장을 받아 적기 바빴습니다.
그림 속에는 벌거벗은 여인 한 명이 옷을 갖춰 입은 두 신사와 함께 풀밭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인은 부끄러워하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그림 밖의 관람객을, 정확히 눈을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점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그림이 그 시절 처음 있는 일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루브르에는 비너스와 님프의 나체가 수백 점 걸려 있었고, 그해 공식 살롱에도 벗은 몸을 그린 그림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그림 앞에서만 파리 시민들은 분노에 가까운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이 그림의 무엇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요.
낙선자들의 전시회
이 그림이 걸린 곳부터가 이례적이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정식 살롱, 즉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계보를 이은 관선 미술전이 아니었습니다. 그해 심사위원단은 유난히 엄격했고, 제출된 작품 가운데 절반이 넘는 수천 점이 무더기로 떨어졌습니다. 화가들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는 5월 31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여론을 달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는 산업궁 별관에 낙선작만 따로 모아 전시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낙선자 살롱(Salon des Refusés)’이었습니다.
떨어진 그림들을 모아 놓은 자리인 만큼, 애초에 이 전시는 화가들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한 자리라기보다 구경거리에 가까웠습니다. 파리 시민들은 “얼마나 형편없길래 떨어졌을까” 하는 심정으로 몰려들었고, 그 가운데서도 에두아르 마네라는 서른한 살 화가의 캔버스 한 점이 유독 큰 소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원래 제목은 ‘풀밭 위의 점심’이 아니라 ‘목욕(Le Bain)’이었습니다.
이 그림, 사실 낯선 구도가 아니었다
마네를 향한 비난 가운데 상당수는 “벗은 여자를 이렇게 뻔뻔하게 그리다니”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네 자신은 이 구도를 처음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 개의 오래된 원전을 정확히 알고 가져다 썼습니다.
하나는 루브르에 걸려 있던 ‘전원의 합주’라는 16세기 그림으로, 당시에는 조르조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티치아노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옷 입은 남성 둘과 벗은 여성 둘이 야외에 함께 있는 구도가 이 그림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새긴 동판화였는데, 강의 신들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자세가 마네의 인물 배치와 거의 겹칩니다.
그러니까 마네는 완전히 새로운 장면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유럽 회화가 삼백 년 넘게 반복해 온 구도를 그대로 빌려 온 셈입니다. 문제는 그가 그 구도를 빌려 오면서, 정작 그 구도를 지탱해 온 알리바이 하나를 빼놓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신화라는 알리바이가 사라진 자리
전원의 합주 속 벗은 여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시(詩)’와 ‘음악’을 상징하는 알레고리였고, 몸을 가지고 있되 인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벌거벗음을 관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신이나 님프, 혹은 추상적인 개념을 그린 것이라면, 몸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일 뿐 실재하는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아카데미 회화가 수백 년간 지켜 온 암묵적인 약속이었습니다.
| 티치아노, ‘전원의 합주’ | 마네, ‘풀밭 위의 점심’ | |
|---|---|---|
| 여성의 정체 | 시와 음악을 상징하는 알레고리 | 파리에서 실제로 활동하던 모델 |
| 남성의 옷차림 | 목가적 시대를 암시하는 의상 | 당대 파리 댄디 스타일 정장 |
| 시선 처리 | 관람객을 보지 않음 |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 |
| 배경 | 시간과 장소가 특정되지 않음 | 파리 근교로 짐작되는 실제 풍경 |
| 관람객의 해석 | 관념, 상징으로 받아들임 |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임 |
마네의 그림에서는 이 약속이 깨졌습니다. 벌거벗은 여인은 여신도, 님프도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마네가 가장 자주 그림에 등장시키던 실제 모델, 빅토린 뫼랑이었습니다. 그녀 곁에 앉은 두 남자 역시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그의 처남이 될 페르디낭 레엔호프였습니다. 배경에서 물놀이를 하는 여성까지 포함해,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네와 가까운 지인들의 얼굴을 그대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관람객이 마주한 것은 신화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파리의 어느 숲에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장면이었습니다. 벌거벗은 몸을 관념으로 소화할 알리바이가 사라지자, 관람객들은 그 몸을 그저 몸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정장을 갖춰 입은 두 남자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설정까지 더해지자, 많은 이들은 이 장면을 부르주아 남성이 여성을 동반한 은밀한 만남, 혹은 매춘의 한 장면으로 읽었습니다. 마네가 훗날 이 그림을 사석에서 ‘네 사람의 밀회(La Partie carrée)’라 부르기도 했다는 사실은, 이런 해석이 완전히 근거 없는 억측만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캔버스 크기가 말해 주는 것
여기에 또 하나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크기입니다. 가로 264센티미터, 세로 208센티미터에 이르는 이 캔버스는, 당시 관습으로는 역사화나 종교화, 신화를 그린 대작에나 어울리는 규모였습니다. 일상의 소풍 장면을 이 정도 크기로 그린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는 시도로 여겨졌습니다. 위대한 사건을 그릴 법한 캔버스에 평범한 파리 시민들의 소풍을, 그것도 벗은 몸으로 그려 넣었으니, 심사위원들의 눈에는 격식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로 비쳤을 법합니다.
마네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마네는 원래 화가가 되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파리 고등법원의 판사였고, 아들이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청년 마네는 대신 해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가 낙방했고, 재도전에서도 실패한 뒤에야 화가의 길을 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토마 쿠튀르의 화실에서 정통 아카데미 수업을 받았지만, 정작 그를 사로잡은 것은 스페인 회화, 특히 벨라스케스와 고야였습니다. 이들의 그림은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과 질감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만드는 화풍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네는 자신의 그림을 옹호하며 “나는 내가 본 것을 그렸을 뿐”이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도발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이 그림이 물의를 일으키리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 그림을 그리기 한 해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고, 이 때문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였습니다.
그가 정말로 문제 삼고 싶었던 것은 벌거벗은 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몸을 신화라는 포장지로 감싸야만 용인해 주는 이중 잣대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카데미는 나체를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나체가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저 먼 곳’의 것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을 뿐입니다. 마네는 그 조건을 지우고, 나체를 파리의 오늘로 데려왔습니다.
붓질마저 완성을 거부하다
관람객들을 불편하게 만든 요소는 소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방식 자체도 이질적이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 회화는 빛과 그림자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정교한 명암 단계, 매끄럽게 마감된 표면을 요구했습니다. 마네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런 단계적 음영 없이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거의 평면적으로 맞붙어 있었습니다. 빅토린의 몸에는 야외의 자연스러운 그림자 대신 실내 스튜디오 조명을 받은 듯한 평평한 밝기가 얹혀 있었고, 배경의 나무와 풀은 세밀한 붓질보다 성긴 터치로 처리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비평가들에게 이 그림은 ‘미완성’으로 보였습니다. 정교하게 마무리하지 않고 스케치 단계에서 멈춘 것처럼 보이는 표면은, 오랜 수련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아카데미적 기교를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 평평한 빛, 대담하게 생략된 붓질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화법이 됩니다. 당시에는 결함으로 읽혔던 것이, 한 세대 뒤에는 새로운 회화 언어의 출발점으로 재평가받은 셈입니다.
조롱, 그리고 몇 안 되는 옹호자들
낙선자 살롱이 문을 연 뒤, 이 그림은 곧 그해 전시 전체를 대표하는 웃음거리로 소비되었습니다. 신문 만평은 이 그림을 패러디했고, 방문객들은 서로에게 이 그림을 보러 가자고 권하며 놀림거리로 삼았습니다. 정작 마네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소수에 그쳤습니다. 다만 몇 년 뒤 젊은 작가 에밀 졸라가 마네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면서, 이 그림을 향한 평가는 서서히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림은 이 전시에서 팔리지 않았고, 마네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이 작품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림이 처음 거래된 것은 1878년, 오페라 가수이자 수집가였던 장바티스트 포르에게 넘어가면서였습니다.
2년 뒤, 다시 찾아온 소동
마네에게 이 소란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2년 뒤인 1865년, 그는 정식 살롱에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출품합니다. 이번에도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었고, 이번에도 그녀는 관람객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신화 속 여신도, 목가적인 풀밭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누운 채 하녀에게서 꽃다발을 받는 여성으로 그려졌고, 많은 이들은 이 장면을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암암리에 통용되던 고급 매춘의 풍경으로 읽었습니다. 두 그림을 놓고 보면, 마네가 계속해서 건드리고 있던 지점이 선명해집니다. 그는 벌거벗은 몸을 신화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 그림은 1906년, 수집가 에티엔 모로 넬라통의 기증으로 프랑스 국가 소유가 되었고, 지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습니다. 관람객들은 더 이상 이 그림 앞에서 웃거나 지팡이를 휘두르지 않습니다. 대신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회화가 신화와 알레고리라는 오래된 언어를 벗어나,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시작한 순간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림 앞에 서면, 백육십여 년 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느꼈던 불편함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되짚어 보게 됩니다. 빅토린의 시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관람객을 향해 있습니다. 다만 그 시선을 받아 내는 사람들의 눈이, 그사이 많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풀밭 위의 점심’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수집가 에티엔 모로 넬라통의 기증으로 1906년 프랑스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작고 이른 시기에 그려진 습작 성격의 버전은 영국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실제 인물인가요?
그렇습니다. 벌거벗은 여성은 마네가 가장 자주 그림에 등장시켰던 모델 빅토린 뫼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 곁의 두 남성은 마네의 동생 외젠 마네와, 그의 처남이 되는 조각가 페르디낭 레엔호프로 전해집니다. 배경에서 물놀이를 하는 여성의 정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확실한 합의가 없습니다.
왜 정식 살롱이 아니라 ‘낙선자 살롱’에 전시되었나요?
1863년 살롱 심사위원단이 유난히 많은 작품을 낙선시키면서 화가들의 불만이 커지자, 나폴레옹 3세가 총선을 앞두고 여론을 달래기 위해 낙선작만 모아 별도로 전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전시가 ‘낙선자 살롱’이며, 마네의 그림은 이곳에서 원래 제목인 ‘목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이 그림이 인상주의와 관련이 있나요?
마네 자신은 인상주의 그룹전에 정식으로 참여한 적은 없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평면적인 빛 처리와 생략된 붓질은 훗날 모네, 르누아르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어받는 화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마네는 흔히 인상주의로 향하는 다리를 놓은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왜 나체 자체보다 이 그림이 더 큰 논란이 되었나요?
당시 살롱에도 나체를 그린 작품은 많았지만, 대부분 신화나 알레고리라는 틀 안에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 틀을 걷어 내고 실제 인물, 실제 옷차림, 실제 응시를 통해 나체를 ‘지금 이곳’의 현실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나체화들과 구분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