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The Night Watch)은 왜 렘브란트 최고의 작품일까?
1715년, 암스테르담 시청의 인부들은 초대형 그림 한 점을 옮기고 있었다. 새로 마련된 전시실 벽은 예전 공간보다 좁았다. 그림은 두 개의 문 사이에 걸려야 했는데, 문틈이 그림의 폭보다 좁았다. 인부들은 그림을 다시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대신 캔버스 네 귀퉁이를 그대로 잘라냈다. 위쪽도, 왼쪽도, 오른쪽도, 아래쪽도. 그중에서도 가장 큰 조각이 떨어져 나간 곳은 왼쪽이었다. 거기에는 최소 두세 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그 조각들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야경(夜警, The Night Watch)”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데 정작 이 장면은 밤이 아니다. 그림 속 인물들의 그림자 방향과 빛이 떨어지는 각도를 자세히 보면, 이것은 명백한 대낮의 풍경이다. 그렇다면 어쩌다 300년 넘게 사람들은 이 그림을 ‘밤’이라고 믿어온 것일까. 그리고 왜 누군가는 이 위대한 그림의 가장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라낼 수 있었을까.
렘브란트 판레인이 1642년에 완성한 이 그림은, 미술사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가장 많이 도난과 훼손의 표적이 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과학자들이 그 앞에서 X선과 인공지능을 동원해 씨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이 왜 그토록 특별한 취급을 받는지, 그리고 왜 렘브란트의 최고작으로 꼽히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그림이 태어난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림은, 사실 밤이 아니었다
그림의 원래 제목은 훨씬 길고 사무적이다.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이 이끄는 제2지구 민병대”. 이 딱딱한 제목이 “야경”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바뀐 것은 그림이 완성되고도 한참 지난 18세기 말의 일이다. 그 무렵 그림 표면에는 니스와 그을음,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원래 밝은 갈색이었던 니스층은 시간이 지나며 짙은 갈색을 넘어 거의 검은빛에 가깝게 변했고, 그 아래 있던 대낮의 장면은 마치 어둠에 잠긴 듯 보이게 되었다. 1797년 무렵 처음 기록된 “야경”이라는 별칭은 바로 이 오해에서 나왔다.
20세기 들어 그림을 덮고 있던 오래된 니스를 걷어내자, 진실이 드러났다. 인물들의 그림자는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뻗어 있었고, 이는 낮 동안 태양빛이 만드는 그림자의 형태였다. 렘브란트는 밤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는 자신의 특기, 즉 명암법(키아로스쿠로)을 극한까지 밀어붙였을 뿐이었다. 인물들 중 일부는 환하게 빛나고, 일부는 짙은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그 결과 관람자의 눈은 저절로 밝은 곳, 그러니까 화가가 의도한 곳으로 이끌려간다. 사람들은 그 효과가 만들어내는 극적인 어둠을 ‘밤’으로 착각했던 셈이다. 이름은 틀렸지만, 이 그림을 300년 넘게 사로잡히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착각을 낳은 명암의 힘이었다.
1640년 무렵, 명사수 조합의 주문
이 그림이 태어난 배경을 이해하려면 17세기 암스테르담의 풍경을 떠올려야 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팔십년전쟁이 사실상 막바지에 접어들며 독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무역 도시로 떠오르고 있었다. 도시를 지키던 민병대, 이른바 ‘시민군’은 더 이상 전쟁터에 나갈 일이 많지 않았다. 그들은 상인이자 유지였고, 민병대 활동은 실질적인 전투 임무보다는 사교와 과시의 장이 되어 있었다.
1638년, 프랑스의 왕대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암스테르담을 방문했을 때 민병대들은 성대한 행렬로 그녀를 맞이했다. 이 화려한 행사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이후 민병대 조합은 새로 지은 회관 ‘클로베니르스도엘런’을 초상화로 장식하기로 했다. 여섯 개 중대가 각각 한 점씩, 서로 다른 화가에게 그림을 맡겼다.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이 이끄는 중대의 그림이 렘브란트에게 돌아갔다.
이 중대의 이름은 ‘클로베니르스’, 즉 화승총병이었다. 그림 속 곳곳에 등장하는 발톱 문양은 바로 이 조합의 상징이었다. 렘브란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고, 이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같은 구도 연구에 깊이 몰두해 있던 화가였다. 그가 이 평범해 보이는 단체 초상화 주문을 받아 무엇을 그려낼지, 이때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각자 값을 낸 사람들, 그러나 평등하지 않았다
여기서 당시 단체 초상화의 관행을 알아야 이야기가 더 흥미로워진다. 이런 그림은 오늘날의 단체 사진과 비슷한 논리로 제작되었다. 그림에 등장하는 각 인물이 비용을 나누어 부담했고, 화면에서 얼마나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부담 금액이 달라졌다. 반닝 코크의 중대에서는 열여덟 명 남짓한 민병대원이 각자 평균 100길더 안팎을 냈고, 화면 앞쪽에 배치될수록 더 많은 돈을 냈다. 렘브란트가 이 그림 전체로 받은 보수는 1,600길더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화가에게 지급된 금액치고는 파격적으로 큰돈이었다.
돈을 낸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대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얼굴이 남들만큼 또렷하게, 남들만큼 정면으로, 남들만큼 밝게 그려지는 것. 그때까지 단체 초상화의 관행은 이 기대에 충실했다. 인물들을 가지런한 줄로 세우고, 모두에게 고르게 빛을 비추고, 모두가 정면을 바라보게 그리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림은 결국 이름표가 붙은 얼굴들의 집합이었고, 누가 봐도 “이 사람이 여기 돈을 냈구나”를 확인할 수 있는 증명사진에 가까웠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렘브란트는 이 계약서 같은 관행을 뒤엎었다. 그는 서른네 명에 달하는 인물을 화면에 채워 넣었는데, 그중 돈을 낸 실제 조합원은 열여덟 명뿐이었고 나머지는 상상으로 더한 인물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나란히 세우지 않고, 막 행진을 시작하려는 찰나의 순간으로 그렸다. 대장 반닝 코크는 검은 옷에 붉은 띠를 두르고 손을 뻗어 부관에게 명령을 내리고, 노란 옷을 입은 부관 빌럼 반 라위턴뷔르흐는 그 명령을 받아 대열을 향해 돌아선다. 배경에서는 북 치는 소년이 진군 신호를 두드리고, 누군가는 총에 화약을 채우고, 누군가는 총을 쏘고, 개 한 마리는 짖어대며 뛰어다닌다.
이 그림에는 정지된 순간이 없다. 모든 인물이 저마다 다른 동작 한가운데 붙잡혀 있고, 화면 전체가 마치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려는 것처럼 팽팽하다. 그때까지 유럽의 단체 초상화 전통에서 이런 시도는 없었다. 정적인 증명사진을 살아 움직이는 한 장면으로 바꿔놓은 것, 이것이 이 그림이 서양 미술사에서 자주 ‘혁명’이라는 단어로 묘사되는 이유다.
당연히 대가가 따랐다. 화면 앞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것은 대장과 부관, 그리고 곧 이야기할 신비로운 소녀뿐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그늘에 걸치거나, 서로 겹치거나, 얼굴 절반이 다른 사람의 어깨에 가려진다. 화면 오른쪽 위, 투구를 쓴 남자의 뒤에서 한쪽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있는 인물이 있는데, 여러 미술사학자는 이것이 렘브란트 자신의 얼굴이라고 본다. 자신의 그림 안에 조용히 서명을 남겨둔 셈이다.
빛 속으로 걸어 나온 소녀
이 혼란스러운 군중 한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여성이자 유일한 어린아이인 이 인물은 금빛 옷을 입고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환하게 그려져 있다. 그녀의 정체는 지금까지도 미술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죽은 닭 한 마리가 발톱이 위로 향한 채 거꾸로 매달려 있고, 그 옆으로 권총 한 자루가 살짝 보인다. 닭의 발톱은 우연이 아니다. 클로베니르스 조합의 문장이 바로 황금빛 발톱이었기 때문이다. 즉 이 소녀는 실존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중대 전체를 상징하는 일종의 마스코트로 해석된다. 그녀가 실제로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왜 렘브란트가 이토록 이질적인 존재를 화면 정중앙 가까이에 배치했는지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둡게 가라앉은 화면 전체에서, 그녀는 관람자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무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명성이 무너졌다는 소문의 진실
이 그림을 둘러싼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 중 하나는 이렇다. 돈을 낸 민병대원들이 자신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것에 분노했고, 이 실패가 렘브란트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혀 그의 말년을 궁핍과 몰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여러 대중적인 글과 다큐멘터리가 이 서사를 반복해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당대의 문서는 남아있지 않다. 실제로 조합원들이 집단으로 항의했다거나 그림 인수를 거부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적이 없다. 그림은 완성된 뒤 예정대로 클로베니르스도엘런 회관에 걸렸고, 렘브란트는 그 이후로도 여러 해 동안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재정 문제와 말년의 몰락은 실재했지만, 그 원인은 무리한 미술품 수집과 부동산 투자, 그리고 아내와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처럼 이 그림과는 무관한 사정들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최근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야경이 렘브란트를 몰락시켰다’는 이야기는, 그의 극적인 삶에 어울리는 비극적 결말을 원했던 후대 사람들이 덧붙인 각색에 가까워 보인다.
칼과 산성 용액을 견뎌낸 그림
이 그림이 겪은 진짜 수난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찾아온다. 1911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분노한 한 실직자가 구두 수선용 칼을 들고 그림에 달려들었다. 다행히 표면을 덮고 있던 두꺼운 니스층이 방패가 되어 캔버스까지는 손상이 닿지 않았다.
1975년, 한 실직 교사가 이번에는 톱니 모양의 빵칼을 들고 대장과 부관이 그려진 부분을 열두 차례나 그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그랬다고 주장했던 이 사건으로 그림에는 폭 몇 밀리미터, 길이 약 50센티미터에 이르는 자상이 여러 개 남았고, 이 흔적은 지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표면의 미묘한 광택 차이로 확인할 수 있다.
1990년에는 정신병원에서 도망친 한 남성이 붉은 옷을 입은 총병 부분에 황산을 뿌렸다. 경비원이 재빨리 물을 뿌려 대응한 덕분에 손상은 표면 니스층에 그쳤다.
세 번의 공격 모두 그림의 핵심 구조는 무너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마다 복원가들이 그림 앞에 다시 모였고, 그 복원의 흔적과 기록은 이 그림이 얼마나 여러 세대에 걸쳐 소중하게 다뤄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다.
사라진 조각을 찾아서
그림을 둘러싼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는 앞서 언급한 1715년의 절단 사건으로 돌아간다. 당시 잘려나간 조각들은 지금까지 단 한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 리크스미술관 회화·조각 부문 책임자 피터르 로엘로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왼쪽에서만 사람 형상 세 명이 사라졌는데, 그만큼 유명하고 값비싼 화가의 그림 조각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다행히 원래 구도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림이 완성된 직후인 1642년에서 1655년 사이, 헤릿 룬던스라는 화가가 이 그림 전체를 축소해서 모사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작은 복제화는 현재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으며, 잘려나가기 전 원래 구도를 유일하게 온전히 보여주는 자료다.
2019년, 리크스미술관은 ‘오퍼레이션 나이트워치’라는 이름으로 이 그림에 대한 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복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특별 스튜디오를 미술관 한가운데 설치해,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528장에 달하는 초고해상도 사진과 엑스선 형광 분석을 진행했다. 연구팀은 이 방대한 데이터와 룬던스의 복제화를 인공신경망에 학습시켜, 렘브란트의 화풍과 색채 구사 방식을 컴퓨터가 익히도록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잘려나간 가장자리 부분을 렘브란트의 화풍으로 재구성해냈고, 2021년 이 재구성된 조각들은 패널에 인쇄되어 원본 그림 둘레에 실제로 부착되었다. 300년 만에 처음으로, 관람객들은 원래 구도에 훨씬 가까워진 ‘야경’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기반한 재현이다. 진짜 잘려나간 캔버스 조각은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 묻혀 있거나, 오래전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리크스미술관 관장 타코 디비츠는 위쪽과 아래쪽 조각은 몰라도, 세 사람이 그려진 값비싼 왼쪽 조각만큼은 누군가 보관하고 있다가 언젠가 연락해오지 않을까 여전히 기대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300년 뒤에도 잘리지 않은 것
지금 암스테르담 리크스미술관의 명예의 전당에는 이 그림이 걸려 있다. 인공지능이 복원한 가장자리 패널이 원본을 감싸고 있고, 그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몰려든다. 대장의 손짓과 소녀의 금빛 드레스, 그리고 화면 구석에서 이쪽을 흘낏 바라보는 화가 자신의 눈동자까지, 관람객들은 380년 전 어느 대낮의 한순간을 들여다본다.
정작 그 순간의 진짜 왼쪽 가장자리, 실제로 존재했던 세 사람의 얼굴은 아직도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조각은 이미 오래전에 재로 변했을지 모르고, 어쩌면 지금도 누군가의 다락방 구석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주 묻는 질문
야경이라는 이름은 원래 제목인가요?
아니다.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이 이끄는 제2지구 민병대”라는 긴 이름이었다. “야경”이라는 별칭은 그림 표면에 낀 짙은 니스와 먼지 때문에 장면이 밤처럼 보인다는 18세기 말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실제로는 대낮의 장면이다.
야경은 지금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리크스미술관(Rijksmuseum) 명예의 전당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2021년 이후로는 오퍼레이션 나이트워치 프로젝트를 통해 재구성한 가장자리 패널이 원본 둘레에 함께 걸려 있다.
그림 속 신비한 소녀는 누구인가요?
정체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물로, 실존 조합원이 아니라 클로베니르스 민병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로 해석된다. 허리에 매단 닭의 발톱이 이 민병대 조합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그림 조각은 결국 찾았나요?
아니다. 1715년 그림을 축소할 때 잘려나간 원본 조각들은 지금까지 한 조각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완성 직후 만들어진 헤릿 룬던스의 모사화 덕분에 원래 구도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2021년 인공지능이 재구성한 이미지가 원본 옆에 전시되고 있다.
이 그림 때문에 렘브란트가 몰락했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이 이야기를 뒷받침할 당대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렘브란트의 말년 재정 파탄은 무리한 수집과 투자, 가족의 잇단 죽음 등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보는 것이 최근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