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 리어왕

리어왕은 왜 인간의 어리석음을 가장 처절하게 그렸을까?

1681년부터 1838년까지, 157년 동안 런던의 관객들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본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리어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극을 보긴 했습니다. 다만 그 연극 속에서 리어는 죽지 않았습니다. 코델리아도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에드거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고, 늙은 왕은 딸의 축복 속에 왕위를 되찾았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너험 테이트가 다시 쓴 이 결말은 무려 150년 넘게 무대를 지배했습니다. 원작의 그 잔혹한 결말, 그러니까 딸의 시신을 품에 안고 왕이 숨을 거두는 장면은 너무 참혹하다는 이유로 아예 사라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4대 비극 중에서 유독 이 작품만, 관객들이 원작 그대로는 견디지 못해서 결말을 바꿔치기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햄릿」도, 「오셀로」도, 「맥베스」도 이런 취급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유독 「리어왕」만이 150년 동안 순화된 얼굴로 무대에 올라야 했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 대가를 얼마나 가차 없이 그려냈는지를 거꾸로 증명해줍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고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관객들조차 감당하지 못할 결말을 굳이 선택했을까요.

“그대의 사랑을 말로 증명하라”

이야기는 왕좌에서 시작됩니다. 나이 든 리어왕은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누어주기로 하고, 그 몫을 정하는 방법으로 이상한 시험을 고안합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딸에게 가장 큰 땅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첫째 고너릴과 둘째 리건은 화려한 언어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과장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시력이나 자유보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내 코델리아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짧게 대답합니다. 자신은 자식된 도리만큼만 아버지를 사랑할 뿐이며, 결혼하면 그 사랑의 절반은 남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요.

리어는 분노합니다. 그는 이 정직한 대답을 사랑의 결핍으로 오해하고, 코델리아를 상속에서 완전히 제외해버립니다. 진심을 말한 딸은 쫓겨나고, 입에 발린 말을 한 두 딸이 왕국을 나눠 갖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 하나로 극 전체의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왜 진실보다 듣기 좋은 말에 더 쉽게 마음을 여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대가는 누가 치르게 되는 것일까요.

이 이야기 자체는 셰익스피어의 창작이 아닙니다. 12세기 제프리 오브 몬머스가 기록한 브리튼 왕들의 역사에도, 16세기 홀린셰드의 연대기에도, 심지어 1605년에 출판된 익명의 희곡 「리어왕의 진짜 연대기」에도 비슷한 줄거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전 판본에서는 하나같이 코델리아가 아버지를 되찾아주고, 왕국을 되찾은 뒤 편안히 삶을 마감합니다. 셰익스피어 이전까지 이 이야기는 늘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왜 셰익스피어만 결말을 뒤집었을까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옮겨갑니다. 왜 셰익스피어는 수백 년간 이어져 온 해피엔딩의 전통을 굳이 깨뜨렸을까요. 학자들은 몇 가지 단서를 짚습니다. 하나는 1603년 런던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사건입니다. 브라이언 애널리라는 귀족의 큰딸이 아버지를 정신이상자로 몰아 재산을 가로채려 했고, 막내딸 코델이 법정에서 아버지를 지켜냈습니다. 이름조차 코델리아와 닮은 이 사건이 당시 런던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사실은, 셰익스피어가 늙은 부모와 자식 간의 재산 다툼이라는 소재를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더 결정적인 것은 셰익스피어가 이 단순한 가족 이야기 옆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나란히 붙여놓았다는 점입니다. 바로 글로스터 백작과 그의 두 아들, 적자 에드거와 서자 에드먼드의 이야기입니다. 필립 시드니의 「아르카디아」에서 소재를 가져온 이 두 번째 줄거리는 리어의 이야기를 그대로 반복하지 않습니다. 대신 뒤틀어서 되비춥니다. 리어가 진실한 딸을 내치고 아첨하는 딸들을 신뢰했듯, 글로스터는 충직한 적자 에드거를 의심하고 야심에 찬 서자 에드먼드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갑니다. 두 노인이 똑같은 실수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복하는 셈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설계입니다. 한 사람의 어리석음이라면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만, 두 사람이 똑같이 눈이 멀었다면 그것은 인간 전체에 관한 이야기가 됩니다.

눈이 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글로스터의 이야기가 던지는 아이러니는 잔인할 만큼 명확합니다. 그는 에드먼드의 계략에 속아 실제로는 자신에게 충성했던 에드거를 반역자로 몰아 쫓아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건의 남편 콘월 공작에게 붙잡혀 두 눈을 뽑히는 형벌을 당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을 무대 위에서 직접 보여줍니다. 당대 관객들에게도 충격적이었을 이 잔혹한 순간은, 그러나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합니다.

눈을 잃은 뒤에야 글로스터는 비로소 진실을 봅니다. 그는 눈이 멀쩡했을 때 에드거를 의심했지만, 눈이 먼 뒤에야 자신을 이끄는 낯선 걸인이 다름 아닌 에드거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로 그에게 의지해 걷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탄식합니다. 눈이 있을 때는 넘어졌었다고요. 셰익스피어는 이 장면을 통해 육체의 시력과 마음의 통찰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냉정하게 드러냅니다. 리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왕좌에 앉아 모든 것을 볼 수 있었을 때 가장 눈이 멀어 있었고, 왕관을 잃고 미쳐가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다스렸던 세상의 진짜 얼굴을 보기 시작합니다.

폭풍 속에서 벗겨지는 것들

리어가 왕국도, 딸들의 존중도, 마지막 남은 시종들마저 잃고 황야로 내쫓기는 장면은 이 극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입니다. 셰익스피어는 굳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을 배경으로 고릅니다. 왕관도, 신하도, 지붕조차 없는 늙은 왕이 벼락과 비바람 속에 홀로 서서 절규하는 이 장면에서, 리어는 처음으로 자신이 평생 외면했던 질문과 마주합니다. 헐벗은 인간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그는 폭풍 속에서 미치광이 흉내를 내는 에드거, 즉 누더기를 걸친 톰을 만나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옷을 다 벗겨놓으면 인간이란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벌거벗은 두 발 짐승일 뿐이라고요. 왕이었을 때는 결코 던지지 않았을 질문입니다. 신하들의 아첨과 왕관의 무게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벌거벗은 실체를, 리어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마주합니다. 이 장면이 후대에 특히 강렬한 울림을 남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권력과 지위라는 옷을 걷어냈을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비극인가, 부조리극인가 — 두 개의 리어왕

이쯤에서 비평가들의 해석은 갈라집니다. 20세기 초 영국의 셰익스피어 학자 A. C. 브래들리는 이 작품을 <cite index=”29-1″>셰익스피어가 그린 세상 중 가장 참혹한 그림이라고 평가했습니다.</cite> 그럼에도 그는 리어의 파국 속에서 도덕적 의미를 읽어냈습니다. 고통을 통해 리어가 마침내 진실한 사랑과 겸손에 도달한다는, 일종의 정화와 구원의 서사로 이 극을 이해한 것입니다. 브래들리에게 리어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장 큰 고통 속에서 가장 깊은 인간적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60년대, 폴란드의 비평가 얀 코트는 전혀 다른 눈으로 이 작품을 읽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강제수용소, 전체주의를 몸소 겪은 동유럽의 시선으로 그는 「리어왕」을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과 나란히 놓았습니다. 그의 유명한 에세이 제목은 아예 이렇게 묻습니다. <cite index=”22-1″>리어왕인가, 「승부의 끝」인가.</cite> 코트가 보기에 리어의 고통에는 구원도,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부조리한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무의미한 형벌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해석에 깊이 영향을 받은 연출가 피터 브룩은 1962년, 코델리아와 켄트, 에드거가 지닌 선함과 구원의 여지를 최대한 걷어낸 채 극도로 삭막한 무대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 공연을 보고 낯설고 불편했다고 토로했지만, 동시에 눈을 뗄 수 없었다고도 회고했습니다.

두 해석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논쟁 자체가 「리어왕」이라는 작품이 지닌 힘을 보여줍니다. 어떤 시대는 이 극에서 인간이 고통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읽어내고, 어떤 시대는 이 극에서 세계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절망을 읽어냅니다. 그 두 가지 읽기가 모두 성립할 만큼, 셰익스피어는 이 이야기 속에 확정되지 않은 여백을 남겨두었습니다.

1838년, 다시 무대에 오른 진짜 결말

그렇다면 어쩌다 테이트의 순화된 결말이 원작을 밀어내고 150년 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17세기 후반 왕정복고기의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선한 인물이 벌을 받고 악한 인물이 살아남는 결말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시인이자 훗날 계관시인이 된 너험 테이트는 1681년, 코델리아를 살려내고 그녀를 에드거와 맺어주는 새로운 결말을 써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각색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사실상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18세기의 저명한 평론가 새뮤얼 존슨조차, 원작 그대로의 결말을 다시 읽는 일을 오랫동안 견디지 못했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이 상황을 뒤집은 것은 19세기의 배우 겸 극장 경영자 윌리엄 찰스 매크레디였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대본을 손질하며 원작의 결말을 되살리려 시도했고, 1838년 코벤트 가든에서 마침내 광대 캐릭터까지 온전히 살린 셰익스피어의 원본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150여 년 만에, 런던의 관객들은 처음으로 진짜 결말과 마주했습니다. 리어가 죽은 딸을 품에 안고 절규하다 숨을 거두는 장면을요. 그리고 그 참혹한 결말이 무대에서 다시 자리를 잡은 뒤로, 「리어왕」은 순화된 판본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다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

리어왕의 이야기가 지금도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 극이 다루는 문제가 결코 옛날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부모가 재산과 권한을 자식에게 넘겨줄 때 벌어지는 갈등, 진심 어린 말과 듣기 좋은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힘을 쥐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오늘날 가족 간의 상속 분쟁이나 부모 부양을 둘러싼 갈등에 관한 기사들을 들여다보면,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장면과 놀라울 만큼 닮은 구도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리어왕이 유독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어떤 예외도 두지 않습니다. 왕도, 충신도, 광대도, 눈먼 노인도 모두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다가 대가를 치릅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언제나,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늦은 뒤에 찾아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리어왕은 실존 인물인가요?

아닙니다. 리어왕의 이야기는 12세기 제프리 오브 몬머스가 기록한 브리튼 왕들의 전설적 계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검증된 실존 인물이 아니라 고대 브리튼의 전설 속 왕으로 여겨집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 이 작품을 썼나요?

학자들은 대체로 1605년에서 1606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봅니다. 첫 공연 기록은 1606년 12월 궁정에서 이루어졌으며, 1608년에 최초의 사절판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원작과 다른 해피엔딩 판본이 실제로 존재했나요?

그렇습니다. 1681년 너험 테이트가 각색한 「리어왕의 역사」는 코델리아가 살아남아 에드거와 결혼하는 결말로 바뀌었고, 이 판본은 1838년까지 영국 무대에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대신했습니다.

광대(Fool) 캐릭터는 어떤 역할을 하나요?

광대는 왕에게 유일하게 진실을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권력 앞에서 아무도 하지 못하는 직언을 농담의 형식을 빌려 던지며, 리어가 자신의 실수를 서서히 깨닫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극 후반부에 이르러 이 인물은 별다른 설명 없이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얀 코트의 부조리극 해석은 지금도 받아들여지나요?

이 해석은 1960년대 냉전기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이후 여러 학자들이 지나치게 허무주의적이라며 반박을 제기했습니다. 지금은 브래들리의 구원론적 독법과 코트의 부조리극적 독법이 서로 경쟁하는 두 가지 주요 해석으로 함께 다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주변 사람과 공유해 보세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