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삶의 의미를 선택하는 한 사람

실존주의란 무엇일까? — 삶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인간의 이야기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인간

1940년, 프랑스 파리. 독일군의 탱크가 개선문 앞을 행진하던 그해, 한 청년 철학 교사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장폴 사르트르. 그는 매일 밤 좁은 막사 안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노트에 무언가를 써 내려갔습니다.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던 그 순간, 그는 오히려 이상한 확신 하나를 얻고 있었습니다.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본질 같은 건 없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그 순간에, 왜 하필 “인간에게 정해진 목적이 없다”는 생각이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여기서 잠깐 시계를 거꾸로 돌려봅시다. 서양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의 믿음 위에서 살아왔습니다. 신이 세상을 설계했고, 신이 인간에게 목적을 부여했으며, 그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곧 올바른 삶이라는 믿음입니다. 마치 컵이 ‘물을 담기 위해’ 만들어지듯, 인간도 ‘무언가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런데 19세기 중반 이후, 산업혁명, 과학혁명, 그리고 니체가 선언한 “신은 죽었다”는 말과 함께, 이 오래된 설계도가 서서히 찢어지기 시작합니다.

컵을 설계한 사람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컵은 이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스스로 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실존주의는 바로 이 지점, 즉 인간이 ‘설계도 없는 컵’이 되어버린 순간에 태어난 철학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철학은 절망의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어떤 사상보다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돌려준 철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실존주의라는 사상이 어떻게 태어났고, 무엇을 말하고자 했으며, 지금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왜 실존주의가 중요한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한 문장이 실존주의 전체를 요약합니다. 언뜻 보면 말장난처럼 들리지만, 이 문장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서양 철학의 전제를 뒤집는 폭탄 선언이었습니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철학은 대체로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먼저 ‘본질(무엇인가)’이 있고, 그다음에 그 본질에 맞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이죠. 가위는 ‘자르기 위한 도구’라는 본질이 먼저 설계자의 머릿속에 있고, 그다음에 실제 가위가 만들어집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여겨졌습니다. 신의 형상대로, 혹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본질을 미리 부여받고 태어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설계도가 없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 던져지고, 그다음에야 스스로 무엇이 될지를 만들어간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목적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만약 인간에게 정해진 본질이 없다면,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누군가 대신 정해줄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부모도, 국가도, 종교도, 심지어 철학자도 그 답을 대신 내려줄 수 없습니다. 오직 나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이 나의 삶을 정의합니다. 이 발상은 20세기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자 동시에 해방이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낳은 철학

실존주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사상은 특정한 역사적 재난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씨앗을 최초로 뿌린 인물로 꼽힙니다. 그는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거대한 철학 체계, 특히 헤겔 철학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헤겔은 역사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이성적 흐름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거대한 체계 속에서,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며 불안해하는 ‘나’라는 개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인간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 앞에서 떨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실존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19세기 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폭탄 같은 선언을 던집니다. 이는 단순히 무신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 전체를 떠받치던 절대적 가치 기준이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신이라는 절대적 좌표가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야 하는 존재, 즉 ‘위버멘쉬(초인)’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실존주의를 대중적 사상으로 폭발시킨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 점령당했고, 사르트르,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식인들은 레지스탕스(저항운동)에 몸담거나 그 주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매일 목숨을 건 선택 앞에 놓였습니다. 밀고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발언할 것인가. 그 어떤 신도, 어떤 이념도 명확한 정답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들은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나이고, 그 선택의 책임 역시 온전히 나의 것이다.”

이렇게 실존주의는 서재의 사변이 아니라, 전쟁과 점령이라는 극한의 현실 속에서 다듬어진 ‘생존의 철학’이었습니다.

실존주의는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가

어떻게: 던져진 존재, 그리고 자유라는 형벌

사르트르는 인간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에 던져진다(피투성, throwness)’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나라, 부모, 시대, 신체를 전혀 선택하지 못한 채 세상에 도착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합니다.

하지만 던져진 이후부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condemned to be free)”고 말합니다. 얼핏 이상한 표현입니다. 자유가 왜 저주일까요?

생각해 봅시다. 만약 신이 정해준 삶의 매뉴얼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매뉴얼대로만 살면 됩니다. 힘들긴 해도 ‘정답’이 있으니 마음은 편합니다. 그런데 그 매뉴얼이 사라졌다면 어떨까요? 이제 나의 진로, 나의 결혼, 나의 가치관, 심지어 나의 도덕적 판단까지, 그 어떤 절대적 기준도 없이 오직 나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전적으로 나에게 돌아옵니다. 핑계를 댈 신도, 운명도, 팔자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무게’이며, 사르트르가 저주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불안, 그리고 자기기만

이 무거운 자유 앞에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불안’을 느낍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불안은 단순히 시험을 앞두고 떠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에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느끼는 근원적인 현기증입니다. 마치 높은 절벽 끝에 서서, 뛰어내리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자각할 때 느끼는 아찔함과 비슷합니다.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사르트르가 ‘자기기만(mauvaise foi, bad faith)’이라 부른 상태에 빠집니다. 자기기만이란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자유가 없는 것처럼, 마치 정해진 역할이나 운명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태도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어”, “회사가 시켜서 어쩔 수 없었어”, “부모님이 원해서 그랬어” 같은 말들이 대표적인 자기기만의 언어입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이 편안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의 의미로 이어지는 다리: 부조리와 반항

사르트르와 자주 묶이지만 결이 조금 다른 인물이 바로 알베르 카뮈입니다. 카뮈는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지만, 실존주의와 뿌리를 공유하는 ‘부조리 철학’을 펼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삶에서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인데, 세계는 그 갈망에 아무런 답도 주지 않는다. 의미를 원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우주 사이의 이 간극이 바로 ‘부조리’라는 것입니다.

카뮈는 이 부조리 앞에서 두 가지 잘못된 선택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육체적 자살(삶을 포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철학적 자살(종교나 이념에 기대어 부조리를 억지로 없는 셈 치는 것)입니다. 그는 이 둘 다를 거부하고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바로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계속 살아가고, 계속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의 유명한 에세이에서 등장하는 시시포스, 즉 영원히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인물을 두고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시시포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 의미가 주어지지 않아도, 그 반복되는 노동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밀어붙이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철학이 삶이 된 사람들

이론만으로는 실존주의의 무게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보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평생 동반자이자 독자적인 철학자였습니다. 그녀는 저서 『제2의 성』에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깁니다. 이는 정확히 실존주의의 논리를 여성 문제에 적용한 것입니다. ‘여성다움’이라는 것이 타고난 본질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부과한 역할과 기대의 축적이라는 통찰이었습니다. 이 한 문장은 이후 페미니즘 사상 전체에 거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이야기도 자주 언급됩니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습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낸 사람들과, 의미를 잃고 무너져 간 사람들의 차이를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환경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 이는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과 정확히 공명하는 통찰이며,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현대 대중문화에서도 실존주의적 질문은 계속 반복됩니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자신이 속한 시스템(회사, 사회, 심지어 시뮬레이션된 세계)의 허구성을 깨닫고 스스로 선택하기 시작하는 서사 구조는, 사실상 실존주의가 던진 질문의 반복된 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속한 이 틀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면, 나는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실존주의는 다른 사상과 어떻게 다른가

구분전통 철학 (플라톤, 종교적 세계관)실존주의
인간관본질(목적)이 존재보다 먼저 있다존재가 먼저이고, 본질은 스스로 만들어간다
삶의 의미신 또는 절대적 진리가 미리 부여개인이 선택과 행동으로 직접 창조
불안에 대한 태도신앙이나 체계로 해소하려 함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함
자유의 성격신의 뜻 안에서의 제한된 자유무한하지만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 자유
대표 인물플라톤, 아퀴나스키르케고르, 니체, 사르트르, 카뮈, 보부아르
핵심 태도순응과 발견선택과 창조

이 표에서 알 수 있듯, 실존주의의 가장 큰 차별점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입니다. 전통 철학에서 인간의 과제는 이미 존재하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면, 실존주의에서 인간의 과제는 진리가 없는 자리에서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21세기는 실존주의가 태어난 20세기 중반과 놀랍도록 닮은 지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태어난 마을에서 평생 같은 직업을 갖고, 부모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흐려졌고, 결혼과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졌으며, 심지어 성별 정체성이나 삶의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예전만큼 견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 각자가 ‘정해진 매뉴얼 없이’ 자신의 삶을 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 잘 사는 것인가”, “결혼과 비혼 중 무엇이 옳은가”, “성공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 이제는 사회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지 못합니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의 저주’가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훨씬 더 넓은 범위로 확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SNS 속에서 남들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보며 느끼는 불안,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라는 끊임없는 자기 점검, 번아웃과 무기력, 이런 현대인의 감정들은 실존주의가 말한 ‘불안’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실존주의는 이 불안을 없애야 할 병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라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신호로 봅니다.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러니 실존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누구도 대신 정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그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곧 ‘실존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핵심 정리

  •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로 요약된다. 인간은 정해진 목적 없이 태어나,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간다.
  • 키르케고르가 씨앗을 뿌리고,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으며, 사르트르와 카뮈가 20세기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를 체계화했다.
  •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며, 이 무거운 자유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많은 사람들은 그 자유를 회피하기 위해 ‘자기기만’에 빠지지만, 실존주의는 그 회피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 카뮈는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반항’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 보부아르는 이 논리를 여성 문제로, 프랭클은 극한의 수용소 경험으로 각각 확장시켰다.
  • 정답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실존주의는 불안을 없애는 법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선택하며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오늘의 한 문장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당신의 모든 선택 하나하나가 곧 당신 자신이 된다.

FAQ

Q1. 실존주의는 허무주의와 같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무주의는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머무르는 태도에 가깝지만, 실존주의는 정해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오히려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둘은 출발점은 비슷해도 결론이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Q2. 사르트르와 카뮈는 왜 사이가 나빠졌나요? 두 사람은 한때 절친한 동료였지만,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 그리고 폭력을 통한 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1952년경 공개적으로 결별했습니다. 이는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Q3. 실존주의는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르트르나 카뮈처럼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도 있지만, 키르케고르는 오히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강조했습니다. 실존주의는 특정 종교관보다는,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진다는 태도 자체에 초점을 맞춘 사상입니다.

Q4.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려면 어떤 책부터 읽어야 하나요? 카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 신화』는 상대적으로 짧고 이야기 형식이라 입문하기 좋습니다. 사르트르의 사상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보고 싶다면 강연록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가 비교적 짧고 명료합니다.

Q5. 실존주의는 지금도 학문적으로 영향력이 있나요? 철학 자체로서는 20세기 중반이 전성기였지만, 그 문제의식은 현대 심리치료(실존주의 심리치료, 로고테라피), 문학, 영화, 자기계발 담론 등 다양한 분야에 여전히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현대의 통념 자체가 실존주의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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