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끝없이 욕망할까
몇 달 동안 벼르던 물건이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신제품이 나온 순간부터 사양을 비교하고, 후기를 찾아 읽고, 가격이 내려가기를 기다리며, 마침내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의 며칠은 유난히 길게 느껴집니다. 배송 조회 페이지를 몇 번이고 새로고침하고, 상자가 도착하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들뜹니다.
그리고 상자가 도착합니다. 포장을 뜯고, 전원을 켜고, 처음 며칠은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길어야 한 달쯤 지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간절했던 물건이 어느새 방 안의 평범한 사물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설렘은 사라졌는데, 신기하게도 마음 한구석에는 또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감각이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경험은 사치품이나 전자기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원하던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오래 짝사랑하던 사람과 사귀게 되었을 때도, 승진을 하거나 원하던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손에 넣기 전에는 그것만 있으면 완전해질 것 같았는데, 손에 넣고 나면 완전함은 잠깐 스쳐 지나가고 곧 다음 결핍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만들어져 있을까요.
원하던 것을 갖고도, 왜 허전할까
이 현상을 처음 정면으로 실험한 것은 1978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과 댄 코츠, 매사추세츠 대학의 로니 재노프-불먼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리노이주 복권에 당첨되어 5만 달러에서 많게는 100만 달러까지 받은 사람 22명을 찾아가 인터뷰했습니다. 동시에 이들과 같은 동네에 사는 평범한 이웃 58명, 그리고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29명의 환자도 함께 조사했습니다.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잡지를 읽거나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에서 얼마나 즐거움을 느끼는가.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습니다. 복권 당첨자들의 현재 행복도는 5점 만점에 4.00점, 평범한 이웃은 3.82점으로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을 묻는 항목이었습니다. 당첨자들은 오히려 이웃보다 낮은 점수를 매겼습니다. 인생을 바꿀 만한 돈을 손에 쥔 사람들이, 커피 한 잔이나 친구와의 잡담 같은 평범한 순간에서는 오히려 덜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지가 마비된 사고 피해자들의 행복도는 예상대로 낮았지만, 그 차이는 사람들이 흔히 짐작하는 만큼 크지 않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를 두 가지 힘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대비 효과입니다. 인생을 바꾸는 사건을 한 번 겪고 나면, 그보다 작은 즐거움들은 상대적으로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다른 하나는 습관화입니다. 아무리 큰 행운도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뇌는 그것을 새로운 기준선으로 받아들이고, 더 이상 특별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 두 힘이 합쳐지면,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 무엇이든 결국 비슷한 수준의 만족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훗날 ‘쾌락 적응’ 또는 ‘행복의 쳇바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연구는 하나의 의문을 남깁니다. 습관화가 이렇게 강력하다면, 애초에 인간은 왜 그렇게까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도록 만들어졌을까요. 답을 찾으려면 심리학 실험실을 벗어나 뇌 안쪽, 훨씬 더 오래된 회로로 들어가야 합니다.
뇌는 갖는 것이 아니라 쫓는 것을 원한다
1950년대부터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뇌 속 도파민을 ‘쾌감 물질’이라고 불러왔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도파민이 분비되니, 그것이 곧 기쁨의 화학적 정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은 사람이 미시간 대학의 신경과학자 켄트 베리지입니다.
베리지와 동료들은 쥐를 대상으로 한 정교한 실험을 통해, 뇌에서 ‘좋아함(liking)’과 ‘원함(wanting)’이 서로 다른 회로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도파민을 인위적으로 늘려주면 쥐는 먹이를 향해 훨씬 더 맹렬하게 달려들었지만, 정작 그 먹이를 먹을 때 느끼는 쾌감의 크기 자체는 전혀 커지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도파민 관련 회로를 억제해도, 이미 손에 넣은 보상을 즐기는 능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도파민은 쾌감을 만드는 물질이 아니라, 무언가를 갖고 싶게 만드는 물질이었던 것입니다.
이 발견은 사소해 보이지만 함의는 큽니다. 우리 뇌 안에는 ‘원하는 시스템’과 ‘즐기는 시스템’이 따로 있고, 진화는 압도적으로 전자에 투자했습니다. 배가 고파 음식을 찾아 헤맬 때, 실제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시간은 몇 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찾아 나서는 시간은 훨씬 깁니다. 생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뇌가 정성을 쏟아야 할 곳은 명확합니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을 음미하는 데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아직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추적하고 붙잡는 데는 지속적인 동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중독이 이토록 끊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베리지와 테리 로빈슨이 제시한 ‘유인 자극 민감화’ 이론에 따르면, 약물을 반복해서 사용하면 뇌의 ‘원함’ 회로만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고, 실제로 그것을 즐기는 감각은 오히려 무뎌집니다. 중독자가 약물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그것에서 얻는 즐거움은 점점 줄어드는 모순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회로는 약물뿐 아니라 쇼핑, SNS, 도박, 음식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합니다.
왜 진화는 만족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구조 자체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보입니다. 만약 어느 조상이 배부르게 먹고 나서 완전히 만족해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는 다음 기근이 찾아왔을 때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미 충분히 가진 뒤에도 계속해서 더 나은 먹이, 더 안전한 거처, 더 유리한 짝을 찾아 헤맨 조상들은 후손을 남겼습니다. 만족을 모르는 개체가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회로가 설계된 환경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완전히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그 사이에 욕망은 자연스럽게 조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 새로운 자극이 끝없이 공급됩니다. 사냥감을 좇던 회로가 이제는 다음 영상, 다음 알림, 다음 할인 상품을 좇도록 동원되고 있는 셈입니다. 회로 자체는 그대로인데, 그 회로를 자극하는 신호의 빈도만 수천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처음 철학적으로 정면에서 마주한 것은 과학이 아니라 19세기의 한 독일 철학자였습니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의 본질을 만족할 줄 모르는 맹목적인 ‘의지’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이 의지에 이끌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도록 던져진 존재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결핍의 고통을 느끼고, 마침내 그것을 손에 넣으면 이번에는 권태라는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 찾아옵니다. 쇼펜하우어는 이 상태를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는 문장으로 압축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만족이란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의 통과 지점일 뿐, 오래 머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부유한 사람이 오히려 무료함에 시달리는 모습을 두고 그는, 가난이 서민의 고질적인 재앙이라면 권태는 상류층의 재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돈과 시간이 넘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지루해하는 광경은, 21세기의 조기 은퇴자나 복권 당첨자에게서도 낯설지 않게 반복됩니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출구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술, 특히 음악을 통해 잠시 의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순수한 관조에 이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근본적으로 삶에 대한 의지 자체를 내려놓는 금욕과 초탈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도달한 이 결론은, 그보다 2천 년도 더 전에 인도의 한 사상가가 이미 다다랐던 지점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갈애: 같은 문제를 본 또 하나의 시선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뒤 처음 설한 가르침에서,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고통(둑카)이라는 진단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을 ‘갈애’, 즉 그치지 않는 목마름 같은 갈망에서 찾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괴롭고, 얻은 것은 언젠가 사라지거나 시들해질까 두려워 또 괴롭고, 원치 않는 것과 마주치면 그 또한 괴로움이 됩니다. 갈애는 채워지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질수록 새로운 갈애를 낳는다는 것이 이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붓다가 그린 그림은 놀랍도록 겹칩니다. 둘 다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둘 다 욕망 자체와의 관계를 바꾸는 데서 답을 찾았습니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이 불교의 가르침과 정신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 이를 여러 차례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제시한 태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세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고통이라는 다분히 비관적인 색채를 띠고, 구원은 예술적 관조나 극단적인 금욕을 통해서만 잠시 혹은 완전히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불교의 갈애 개념은 갈망 자체를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되, 그 방법을 일상 속에서 훈련 가능한 마음의 태도, 즉 집착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좀 더 실천적인 길을 열어둡니다. 하나는 세계를 향한 비관에서 출발하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작동 방식에 대한 관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상이 공통으로 짚어낸 이 구조가 21세기의 신경과학이 실험실에서 재확인한 구조와 정확히 겹친다는 사실입니다. 철학자와 수행자가 내면을 관찰해 도달한 결론에, 과학자는 뇌 회로를 관찰해 도달한 셈입니다.
욕망을 설계하는 사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뇌에 이런 회로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정교하게 활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산업입니다. SNS의 무한 스크롤은 다음 게시물이 무엇일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원함’ 회로가 가장 강하게 반응하는 조건인 불확실한 보상을 지속적으로 공급합니다. 슬롯머신의 설계 원리와 사실상 같습니다. 온라인 쇼핑몰의 한정 수량, 카운트다운 타이머, 실시간 재고 알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장치들은 소비자가 물건 자체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놓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구매 버튼을 누르게 만듭니다.
베리지의 연구가 밝혔듯, 이런 자극은 실제 만족감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갈망만을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을 산 직후에는 잠깐 기분이 좋아지지만, 소비 자체가 늘어날수록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는 오히려 낮아지는 현상이 여러 소비 심리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됩니다. 갈망은 점점 커지는데 그것을 채워도 남는 것은 다시 갈망뿐인 구조, 브릭먼의 복권 당첨자들이 겪었던 일이 훨씬 더 촘촘하고 빠른 주기로 우리 일상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셈입니다.
만족이 아니라 방향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쇼펜하우어라면 예술 속에서 잠시 벗어나라고 말했을 것이고, 붓다라면 갈망이 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현대 심리학의 언어로 옮기면, 핵심은 갈망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새 물건을 사기 전에 느끼는 흥분이 실제 만족의 예고가 아니라 그저 ‘원함’ 회로의 신호라는 것을 안다면, 그 흥분에 덜 속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둘 것은, 욕망 자체가 문제의 근원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언가를 원하는 힘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배우게 하고, 만들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갈망을 만족의 증거로 착각하는 데 있습니다. 원하는 마음과 만족하는 마음은 애초에 뇌 안에서 서로 다른 자리에 있다는 사실, 이 하나만 기억해도 다음 번 택배 상자를 열 때의 태도는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상자를 열고 며칠 뒤 찾아오는 그 밋밋한 기분은 실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22명의 복권 당첨자가, 쇼펜하우어의 시계추가, 그리고 수백만 년 전 사바나를 헤매던 조상들의 뇌가 똑같이 겪었던 일이 지금 당신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신호일 뿐입니다. 다음 상자가 도착했을 때, 그 설렘을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쾌락 적응, 혹은 ‘행복의 쳇바퀴’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그 사건에 익숙해져, 결국 원래의 행복 수준으로 돌아가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1978년 브릭먼 등의 복권 당첨자 연구가 이 개념을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다만 이 연구는 표본이 22명으로 크지 않고, 한 시점만을 조사한 횡단 연구라는 한계도 함께 지적받습니다.
도파민이 쾌감 물질이 아니라면, 쾌감은 어디서 오나요?
켄트 베리지의 연구에 따르면 쾌감, 즉 ‘좋아함’은 뇌의 훨씬 더 작고 제한된 영역들에서 만들어지며 도파민에 크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반면 도파민은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원함’ 또는 유인 자극에 관여합니다. 두 시스템이 대체로 함께 작동하지만, 중독이나 강박적 소비처럼 둘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욕망관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요?
두 사상 모두 욕망의 충족이 근본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보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세계 자체를 고통스러운 의지의 발현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비관주의에 가깝고, 예술적 관조나 극단적 금욕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불교의 갈애 개념은 이를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관찰과, 일상에서 훈련 가능한 태도의 문제로 다룬다는 점에서 결이 다릅니다.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가능하거나 바람직한가요?
욕망은 학습과 성취, 관계 형성의 동력이기도 하므로 완전히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기는 어렵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철학과 심리학 모두에서 강조하는 지점은 욕망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갈망이 실제 만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기업의 마케팅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나요?
한정 수량 표시, 카운트다운, 무한 스크롤, 예측 불가능한 보상 알림 등은 모두 뇌의 ‘원함’ 회로가 불확실성과 결핍 신호에 가장 강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이용합니다. 실제 상품의 필요보다 놓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자극해 구매나 사용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슬롯머신의 보상 설계 원리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