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한 고대 바빌론

고대 바빌론은 어떻게 번영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만들어진 손바닥만 한 점토판 하나가 대영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표면에는 쐐기 모양의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는데,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은 얼마를 빌려주었고, 이자는 한 달에 몇 퍼센트로 계산하며, 언제까지 갚지 않으면 어떤 담보가 넘어가는지가 조목조목 적혀 있습니다. 빌려준 사람의 이름은 에기비(Egibi),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바빌론을 다스리던 시절에 활동한 한 집안입니다.

이 점토판이 놀라운 이유는 계약의 내용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계약서가 한 장이 아니라 수천 장 발견되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토지 매매, 노예 거래, 동업 계약, 선물(先物) 거래, 유산 분쟁까지, 지금 우리가 은행이나 법무사에서 처리할 법한 일들이 이미 기원전 6세기 바빌론에서 일상적으로 오가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어떻게 이런 정교한 경제 활동이 가능했을까요. 그 답을 따라가다 보면 바빌론이라는 도시가 두 번 흥하고, 한 번 무너지고, 다시 일어선 이야기 전체와 만나게 됩니다.

손바닥만 한 점토판이 말해주는 것

에기비 가문의 기록은 1870년대에 발굴된 이후 지금까지 약 1,700~2,000점가량이 정리되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대부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시대까지, 다섯 세대에 걸쳐 쌓인 문서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바빌론 인근 농지에서 곡물을 사들여 도시의 시장과 신전, 왕궁에 되파는 유통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은 세금 대행, 농지 관리, 부동산 중개로 뻗어나갔습니다.

이런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이 정도로 복잡한 상업 활동을 벌이고, 그 기록을 수십 년간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 전체가 계약을 지키고, 분쟁이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고, 재산권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부는 결국 그 부를 지켜주는 제도 없이는 쌓이지 않습니다. 바빌론의 번영을 이해하려면 에기비 가문이 활동하기 1,200년 전, 전혀 다른 이유로 시작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왜 하필 이 메마른 땅이었을까

바빌론이 자리 잡은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연 강수량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 가운데 하나가 자라난 이유는 단 하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때문입니다. 다만 이 두 강은 이집트의 나일강과는 성격이 전혀 달랐습니다. 나일강은 매년 여름 규칙적으로 범람하면서 비옥한 검은 흙을 밭에 얹어주고 물러갔습니다. 반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는 봄에 눈 녹은 물이 한꺼번에 밀려 내려오는데, 하필 이 시기가 곡식이 한창 자라는 때와 겹칩니다. 강물이 불어나면 애써 키운 작물이 통째로 쓸려나갈 위험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강 바로 옆이 아니라 강에서 조금 떨어진 땅을 경작지로 삼고, 그곳까지 물을 끌어올 운하와 수로를 직접 파야 했습니다. 이 작업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수로를 파고 유지하려면 많은 인력을 조직하고, 물을 어떻게 나눌지 규칙을 정하고, 상류와 하류 마을 사이의 다툼을 조정할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바빌론이라는 도시국가가 훗날 거대한 왕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바로 이 물 관리의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관개는 단순한 농업 기술이 아니라 국가를 만든 원동력이었습니다.

함무라비가 판 것은 운하만이 아니었다

기원전 1792년 왕좌에 오른 함무라비는 즉위 초반 30년 가까이 눈에 띄는 정복 전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도시의 기반을 다지는 데 공을 들였습니다. 그러다 재위 후반, 주변 도시국가들을 차례로 병합하며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묶어냈습니다. 정복이 끝난 뒤 함무라비가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운하 정비였습니다. 그가 새로 판 운하 중에는 니푸르, 이신, 우루크, 라르사, 우르, 에리두를 잇는 약 160킬로미터 길이의 수로도 있었는데, 이 운하에는 “함무라비는 백성의 풍요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함무라비는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물과 곡식의 풍요로움으로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물리적 기반시설에 어울리는 제도적 장치를 함께 만들었는데, 그것이 훗날 함무라비 법전으로 불리는 282개조의 성문법입니다. 이 법전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형벌 조항보다 오히려 경제 조항에 있습니다. 양치기가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밭에 양을 풀어놓았을 때 어떻게 배상해야 하는지, 도량형을 어떻게 통일할지, 토지 임대차 계약에서 소작료를 어떤 방식으로 나눌지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지주와 왕실, 신전은 땅을 직접 경작하는 대신 농민에게 빌려주고 수확량의 일정 몫을 받는 방식으로 관리 부담을 줄였고, 심지어 수확 전에 미리 값을 정해두는 일종의 선물 거래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법이 예측 가능해지자 상인과 농민은 더 과감하게 거래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계약을 어기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가 분명하니, 낯선 사람과도 안심하고 곡식을 사고팔거나 돈을 빌려줄 수 있었던 셈입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정리에 따르면, 바빌론의 부는 개선된 기반시설과 관개, 무역, 그리고 훗날의 군사적 확장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이 도시의 힘은 중앙집권적 통치와 외교, 그리고 법이라는 여러 요소가 겹쳐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함무라비가 물려준 것은 운하 network 하나가 아니라, 낯선 이들끼리도 안심하고 거래할 수 있는 신뢰의 틀이었습니다.

직물, 대추야자, 그리고 낙타 등에 실린 주석

법과 관개만으로는 도시가 부유해지지 않습니다. 그 위에서 실제로 사람들이 무엇을 만들고 팔았는지를 봐야 합니다. 바빌론의 경제는 크게 세 축으로 돌아갔습니다. 보리와 밀 같은 곡물, 대추야자, 그리고 직물입니다. 특히 바빌로니아산 직물은 품질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이 옷감을 짜고 다듬는 일은 주로 여성과 아동, 그리고 노예 신분의 사람들이 맡았습니다. 완성된 직물은 나귀를 이용한 대상(隊商)에 실려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까지 팔려나갔고, 돌아오는 길에는 이란에서 들여온 주석이 함께 실렸습니다. 주석은 청동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자원이었으므로, 바빌론은 원자재가 부족한 곳에서도 무역을 통해 산업의 재료를 확보하는 법을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무역로를 오가는 데는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두 달이 걸렸습니다. 그 사이 상인이 사고를 당하거나 물건을 빼돌릴 위험은 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장거리 교역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법과 계약 제도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손해를 봤을 때 하소연할 곳이 없다면 애초에 아무도 낙타 등에 재산을 실어 보내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허에서 다시 태어난 도시

여기서 이야기는 한 번 끊깁니다. 함무라비의 후계자들은 선왕만큼 유능하지 못했고, 왕국은 서서히 힘을 잃었습니다. 기원전 1595년, 히타이트 군대가 바빌론을 습격해 도시를 약탈했습니다. 이후 바빌론은 카시트 왕조, 아시리아의 지배를 거치며 수백 년 동안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는 도시로 남았습니다. 기원전 689년에는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 왕이 반란을 일으킨 바빌론을 아예 물길로 덮어버렸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바빌론이 역사상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이로부터 한 세기 남짓 지난 뒤, 아시리아 제국이 무너지고 나보폴라사르와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이른바 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세우면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기원전 605년부터 562년까지 40년 넘게 왕위에 있었는데, 즉위 직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이집트군을 크게 무찌르며 근동의 새로운 패권자로 떠올랐습니다. 폐허 위에서 시작한 도시가 한 세대 만에 고대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수도로 거듭난 것입니다. 실패와 파괴의 역사가 오히려 다음 번영의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바빌론의 재건은 한 번의 성공담이 아니라 반복된 좌절 끝에 얻어낸 결과였습니다.

이슈타르 문 너머의 상인들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바빌론을 상징하는 것은 청록색 유약을 바른 벽돌에 사자와 용, 황소 문양을 새겨 넣은 이슈타르 문입니다. 지금은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는 이 문은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나야 했던 관문이었고, 그 화려함 자체가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한지를 보여주는 광고판이기도 했습니다. 공중정원의 존재 여부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실제로 바빌론에 정원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리스 저술가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진 것이며, 최근 일부 학자들은 그 정원이 바빌론이 아니라 아시리아의 니네베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공중정원은 확정된 사실이라기보다는, 여러 해석이 공존하는 전설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시기 바빌론이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점입니다. 은을 기준 화폐처럼 사용하는 거래 관행이 자리 잡았고, 대금업자들은 곡물과 은을 오가며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기록에 남은 이자율은 시기에 따라 들쭉날쭉했는데, 네부카드네자르 5년 차의 한 계약서에는 은 1탈렌트를 빌려주고 월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이자를 받았다는 내용이 남아 있고, 다른 시기에는 월 20퍼센트에 이르는 계약도 확인됩니다. 심지어 에기비 가문의 한 구성원은 땅을 살 때까지 갚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으로 이자 없이 돈을 빌려준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편차는 당시 정치 상황과 신용도에 따라 금리가 실시간으로 움직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금융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입니다.

은행가로 불렸지만 은행가는 아니었던 사람들

에기비 가문에 관해 오랫동안 널리 퍼져 있던 설명이 하나 있습니다. 이들이 고대의 “은행”을 운영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학자들은 에기비 가문을 유대인 혈통의 은행가 집안으로 소개하며, 이름 자체가 성경 속 야곱과 관련이 있다는 추측까지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쐐기문자 문서를 정밀하게 재검토한 연구자들, 특히 코넬리아 분쉬 등의 연구는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에기비 가문은 곡물 같은 생필품을 바빌론 인근 농지에서 도시 내부의 시장과 신전, 왕궁으로 운반해 파는 유통업으로 부를 쌓기 시작했고, 이후 사업이 식품업, 세금 징수 대행, 농지 관리 등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은행업은 이 집안의 핵심 활동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최근 연구의 결론입니다.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은행이라기보다 오늘날의 종합상사나 자산관리회사에 가까웠던 셈입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활동도 분명 있었지만, 그것은 여러 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뿐, 예금을 모아 대출해주는 근대적 의미의 은행업과는 결이 달랐습니다.

이 정정은 사소한 트집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바빌론 경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신바빌로니아의 부는 소수의 전문화된 금융업자가 아니라, 여러 사업을 넘나드는 유연한 상인 가문들이 떠받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신전과 왕실만이 경제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개인 기업가들이 경제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이런 재해석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시 그 점토판 앞에서

처음의 점토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은을 빌려주고 이자를 계산하고 담보를 정한 그 짧은 문서는, 이제 훨씬 더 큰 그림 속에서 다시 읽힙니다. 이 계약이 가능했던 것은 함무라비 시대부터 다져진 관개농업이 안정적인 잉여 곡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고, 성문법이 계약 위반의 대가를 분명히 해두었기 때문이며, 도시가 몇 차례 무너졌다가도 그때마다 무역로와 제도를 되살려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제도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왕의 명령이 아니라, 에기비 가문처럼 이름은 남았지만 얼굴은 알 수 없는 수많은 상인과 농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메마른 흙 위에 세워진 이 도시가 남긴 것은 화려한 유적만이 아닙니다. 물을 나누는 규칙, 계약을 지키게 만드는 법,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장을 여는 회복력, 이 세 가지가 겹쳐질 때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바빌론은 지금의 어느 나라에 있나요?

고대 바빌론의 유적은 현재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약 85킬로미터 떨어진 힐라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존재했나요?

공중정원의 존재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논쟁 중인 주제입니다. 바빌론 현지의 발굴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직접적인 물증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일부 학자는 정원이 실제로는 아시리아의 니네베에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그리스와 로마 저술가들의 기록을 통해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세계 최초의 법전인가요?

함무라비 법전은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초기 성문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세계 최초는 아닙니다. 이보다 앞서 우르남무 법전 등 수메르 지역의 법전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있습니다. 다만 함무라비 법전은 282개 조항이 비교적 온전하게 전해진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특히 높게 평가됩니다.

이슈타르 문은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이슈타르 문의 주요 부분은 20세기 초 독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독일로 옮겨졌으며, 현재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빌론 현지에는 이라크 정부가 세운 축소 복원본이 남아 있습니다.

에기비 가문은 왜 은행가로 잘못 알려졌나요?

20세기 초 초기 연구자들이 이 가문의 대출 및 계약 활동을 근대적 은행업과 유사하다고 해석하면서 “은행가 집안”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졌습니다. 이후 문서를 재검토한 연구에서는 이들의 핵심 사업이 곡물 유통과 자산 관리, 세금 징수 대행이었으며 예금과 대출을 결합한 은행업은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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