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시작

우물 속 190개의 도자기 조각, 민주주의의 탄생을 다시 묻다

1937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쪽 경사면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오래된 우물 하나를 마주하게 됩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흙 속에 파묻힌 것은 깨진 도자기 조각 190개였습니다. 하나하나에는 그리스 문자로 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kles). 페르시아 전쟁의 영웅이자, 아테네를 해상 강국으로 만든 바로 그 인물의 이름이었습니다.

이상한 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필적을 분석한 결과, 190개의 조각을 새긴 사람은 겨우 14명에 불과했습니다. 시민 각자가 자기 손으로 이름을 새겨 넣어야 했을 이 물건들이, 실제로는 소수의 손에서 미리 대량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 투표용지를 인쇄해 창고에 쌓아 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도자기 조각의 이름은 오스트라콘(ostrakon), 우리가 흔히 도편추방제라 부르는 제도의 투표용지입니다. 시민들은 매년 한 차례, 나라에 위협이 될 만큼 강력해진 정치인의 이름을 이 조각에 새겨 넣었습니다. 6천 표 이상을 얻은 사람은 재판도 변론의 기회도 없이 10년간 아테네를 떠나야 했습니다. 재산은 몰수되지 않았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너무 강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추방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투표가, 애초에 조작될 수 있는 도구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류 최초의 민주정이라 불리는 도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말 어떻게 태어났는지부터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주정이 무너진 자리에서

기원전 6세기 말,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의 참주정 아래 있었습니다. 참주(僭主, tyrannos)라는 말은 오늘날의 ‘독재자’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오히려 서민에게 농업 대출을 해 주고 축제를 후원하며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통치자였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뒤를 이으면서 시작됩니다. 동생 히파르코스가 암살당한 뒤, 히피아스는 의심과 보복으로 통치 방식을 바꾸었고, 아테네의 유력 가문들은 하나둘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 510년,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가 군대를 이끌고 개입하면서 히피아스는 결국 아테네에서 쫓겨납니다. 참주정은 끝났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이상적인 시민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아테네의 명문가들 사이에서 곧바로 권력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경쟁의 중심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사고라스는 보수적인 귀족 세력을 대표했고, 클레이스테네스는 알크마이온 가문 출신으로 이사고라스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08년 선거에서 이사고라스가 최고 관직인 아르콘에 오르자, 클레이스테네스는 궁지에 몰립니다. 이사고라스는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를 다시 끌어들여 클레이스테네스와 그 지지 세력 700가문을 아테네에서 몰아내려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민주주의의 탄생에서 가장 자주 잊히는 대목입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념가로서 민중에게 권력을 나누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정쟁에서 패배 직전에 몰린 정치인이었고,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바로 아테네의 평범한 시민, 데모스(demos)에게 지지를 호소한 것입니다.

이틀간의 포위, 그리고 예상 밖의 승리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는 군대를 이끌고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무장하고 일어나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한 것입니다. 스파르타군과 이사고라스 세력은 이틀을 버티다 항복했고, 클레오메네스는 안전한 퇴각을 조건으로 아크로폴리스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이사고라스는 함께 도망쳤지만, 그와 함께 있던 아테네인 300명은 붙잡혀 처형당했다고 전해집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하고 외국 군대에 맞서 싸운 이 사건은, 아테네 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됩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망명지에서 돌아왔고, 이제 그의 앞에는 이런 질문이 놓여 있었습니다. 자신을 왕좌에 앉혀 준 이 힘, 즉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적 에너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는 이 힘을 다시 개인의 권력으로 돌려놓지 않고, 아예 정치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씨족을 해체하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서 가장 급진적인 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바로 아테네 시민들의 소속 자체를 새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그전까지 아테네인은 혈연에 기반한 4개의 오래된 부족(phylai) 중 하나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 부족 조직은 곧 명문가들의 세력 기반이었습니다. 귀족 가문은 자기 지역 농민들을 오랜 인맥과 채무 관계로 묶어 두었고, 선거철마다 이 조직표를 그대로 표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 낡은 부족 체계를 통째로 폐기했습니다. 대신 아테네 전역을 해안 지역, 도심 지역, 내륙 지역 셋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서 다시 여러 구역(데모스, demos)을 추려 낸 뒤, 세 지역에서 하나씩 데모스를 뽑아 묶어 새로운 부족 10개를 만들었습니다. 한 부족 안에 해안 사람과 도시 사람, 산골 농부가 함께 섞이도록 만든 것입니다. 특정 가문이 자기 지역 하나를 완전히 장악해도, 더 이상 부족 전체를 좌우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열 개의 새 부족을 기반으로 500인 평의회(불레, Boule)가 구성되었습니다. 각 부족에서 50명씩, 추첨으로 뽑았습니다. 시험도, 선거도 아닌 제비뽑기였습니다. 아테네인들은 능력이나 인기가 아니라 순전한 우연으로 나랏일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이상하게 들리지만,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추첨은 오히려 공정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선거는 웅변에 능하고 인맥이 넓은 소수 엘리트에게 유리한 제도였던 반면, 추첨은 그 누구도 미리 결과를 조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전장치로 태어난 추방 제도

도편추방제 역시 이 무렵 함께 도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인기와 세력을 등에 업고 참주로 변신할 만한 인물이 다시 나타나기 전에, 미리 제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실제로 첫 도편추방은 개혁으로부터 20년 뒤인 기원전 487년에야 시행되었는데, 그 대상은 옛 참주 가문과 연관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볼 수 있습니다. 우물 속에서 발견된, 미리 새겨진 190개의 테미스토클레스 도편은 이 제도의 배신일까요, 아니면 이 제도가 처음부터 품고 있던 성격을 보여 주는 증거일까요.

답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도편추방제를 발의하고 표결에 부치는 과정 자체가 이미 정치 세력 간의 조직전이었습니다. 어떤 이름을 추방 대상으로 올릴지 미리 논의하고, 지지자들을 모으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이름이 새겨진 도편을 나누어 주는 일은 공공연한 선거 운동의 일부였습니다. 우물 속에 남은 190개의 도편은 아마도 테미스토클레스의 정적들이 준비했다가, 정작 그 해의 표결에서는 쓰이지 않아 처분한 물건으로 추정됩니다. 부정행위의 흔적이라기보다, 아테네 정치가 처음부터 파벌과 조직, 설득과 동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증거에 가깝습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자체가 그러했듯, 아테네의 민주정은 순수한 이상에서 출발한 적이 없습니다. 권력을 잃을 위기에 몰린 정치인이 살아남기 위해 민중을 끌어들였고, 그렇게 형성된 제도 안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파벌을 이루고 표를 조직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치라는 게임 자체를 없앤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의 규칙을 바꾸어 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 그러나 모두는 아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체제에서 정치의 중심 무대는 프닉스 언덕이었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한 해에 약 40차례, 이 언덕에 모여 전쟁과 평화, 세금과 곡물 수입, 동맹과 재판을 직접 의논하고 손을 들어 결정했습니다. 대표를 뽑아 대신 결정하게 하는 대의제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가 입법자이자 유권자였던 셈입니다.

다만 ‘시민’이라는 말의 범위를 정확히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테네와 그 주변 아티카 지역의 전체 인구는 학자들의 추정에 따라 대략 25만에서 30만 명 사이로 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정치에 참여할 자격, 즉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은 많아 봐야 3만에서 4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노예는 애초에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고, 아테네에 거주하며 세금을 내고 군대에 복무하기도 했던 외국인 거주자(메토이코이)에게도 참정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아테네 태생이든 아니든, 어떤 신분이든 이 정치 무대에 설 수 없었습니다.

프닉스 언덕에 모인 사람들이 손을 들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장면은 분명 혁신적이었지만, 그 언덕 아래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발언권 없이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이 사실을 함께 놓지 않으면, 우리는 그 제도의 절반만 보게 됩니다.

두 개의 민주주의

여기서 잠깐, 아테네의 정치 체제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민주주의를 나란히 놓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작동 방식은 상당히 다릅니다.

구분고대 아테네 민주정현대 대의 민주주의
의사 결정 방식시민이 직접 모여 표결선출된 대표가 대신 결정
공직자 선출대부분 추첨(제비뽑기)대부분 선거
참여 자격성인 남성 시민에 한정원칙적으로 전 성인 시민
견제 장치도편추방제, 임기 1년삼권분립, 임기제, 언론
규모도시국가 단위국가 단위, 수천만 인구

이 표에서 특히 눈에 띄는 차이는 추첨입니다. 아테네인들에게는 선거로 대표를 뽑는 오늘날의 방식이 오히려 귀족정에 가깝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말을 잘하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유리한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제비뽑기로 국가 요직을 채운다는 발상이 무모하게 느껴집니다. 같은 이름 아래, 공정함에 대한 생각 자체가 이렇게 달랐습니다.

이름을 얻기까지

흥미롭게도 ‘데모크라티아(demokratia)’, 즉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당시에는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더 널리 쓰인 말은 이소노미아(isonomia), ‘법 앞의 평등’에 가까운 개념이었습니다. 데모스(민중)의 크라토스(권력, 지배)를 뜻하는 데모크라티아라는 표현이 문헌에 자리 잡는 것은 이보다 한 세대 뒤, 기원전 460년대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귀족 회의체였던 아레오파고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이후의 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테네 민주주의’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사실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최소 반세기에 걸친 여러 차례의 개혁이 쌓인 결과입니다. 참주정의 붕괴, 클레이스테네스의 부족 개편과 500인 평의회, 도편추방제의 도입, 그리고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의 추가 개혁까지, 여러 세대의 정치인들이 저마다의 필요에 따라 조금씩 손을 댄 끝에 완성된 체제였습니다.

우물 속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제 처음의 우물로 돌아가 봅니다. 1937년에 발견된 190개의 도편은, 어느 해엔가 준비되었지만 끝내 쓰이지 못하고 우물 속에 버려졌습니다. 그 도편을 준비한 14명의 필체는 2400년 가까이 흙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우연히 발굴자의 손끝에 다시 드러났습니다.

이 물건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배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하게 설계된 이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권력 다툼에서 밀린 한 정치인이 살아남기 위해 민중을 끌어들이면서 시작된, 지극히 현실적인 타협의 산물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편을 가르고, 표를 조직하고, 때로는 제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제도는 무너지지 않고 이어졌고, 참여의 범위를 넓혀 가며 오늘날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우물 속 도편들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 새겨진 이름 하나가, 완벽하지 않았던 시작에서도 무언가는 자라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테네 민주주의는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나요?

일반적으로 기원전 508년 또는 507년,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을 그 출발점으로 봅니다. 다만 ‘데모크라티아’라는 용어와 개념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기원전 460년대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의 개혁 이후로 보는 견해가 많아, 단일한 하루로 못박기는 어렵습니다.

아테네 시민 중 실제로 투표할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명이었나요?

아티카 전체 인구가 25만에서 3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데 비해, 참정권을 가진 성인 남성 시민은 3만에서 4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예와 여성, 외국인 거주자(메토이코이)는 이 범위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도편추방제는 왜 만들어졌나요?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같은 인물이 인기를 등에 업고 참주로 변신하는 일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도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죄를 지었는지와 무관하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인물을 10년간 나라 밖으로 내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여성은 왜 아테네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나요?

당시 그리스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성 역할 관념에 따라, 여성은 가정 내 영역에 속한다고 여겨졌고 공적 영역인 정치와 재판, 군사 활동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는 아테네만의 특수한 제도라기보다, 고대 지중해 사회 대부분에서 공유되던 통념에 가까웠습니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왜 오늘날 그대로 쓰이지 않나요?

가장 큰 이유는 규모입니다. 수천 명이 언덕에 모여 손을 들던 방식은 인구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는 현대 국가에는 물리적으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시민이 대표를 선출해 결정을 위임하는 대의 민주주의가 근대 이후 표준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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