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왜 필요할까? — 법은 있었지만, 그 법을 강제할 사람이 없었던 나라
1241년 9월 23일 밤, 아이슬란드 서부 레이크홀트의 한 저택. 예순을 넘긴 노시인이 지하 저장고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바깥에는 그의 사촌이 보낸 무장한 남자 70여 명이 들이닥쳐 있었고, 곧 저택 안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노인은 저장고에서 끌려 나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스노리 스투를루손, 아이슬란드 최고의 문장가이자 두 차례나 의회의 수장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이 죽음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암살을 사주한 사람은 아이슬란드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노르웨이의 왕 호콘 하코나르손이 내린 밀명이었고, 실제로 칼을 든 사람은 스노리의 사촌 기수르였습니다. 그런데 사건 이후 기수르를 체포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재판에 넘겨진 사람도, 옥에 갇힌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애초에 사람을 잡아 가둘 경찰도, 판결을 강제로 집행할 왕이나 군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섬에는 이미 300년 넘게 이어져 온 의회가 있었고, 정교한 성문법이 있었으며, 해마다 여름이면 온 섬의 자유민들이 모여 소송을 벌이는 법정까지 있었습니다. 법을 만들고 판결을 내리는 절차는 다른 어느 중세 왕국 못지않게 촘촘했습니다. 정작 그 판결을 실행에 옮길 손이 없었을 뿐입니다. 법은 있는데 법을 강제할 사람은 없었던 나라, 이 나라는 어떻게 300년을 버텼고, 왜 하필 이 무렵 무너졌을까요. 이 물음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국가’라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가 드러납니다.
왕을 피해 떠난 사람들이 세운 나라
아이슬란드에 사람이 처음 정착한 것은 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이주민 대부분은 노르웨이 출신이었는데, 그중 상당수는 국왕 하랄 1세(미발왕 하랄)가 노르웨이 전역을 하나의 왕권 아래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에게 세금을 내고 병력을 제공해야 하는 처지가 싫어서, 아예 왕이 없는 곳으로 옮겨 간 셈입니다.
새 땅에 정착한 이들은 각자 땅을 나누어 가진 유력자, 곧 ‘고디’라 불리는 족장을 중심으로 뭉쳤습니다. 다만 이 족장과 부하의 관계는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농노 관계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자유농민은 자신이 따르는 고디를 스스로 고를 수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고디에게 옮겨 갈 수도 있었습니다. 지배와 복종이라기보다는 계약에 가까운 관계였던 셈입니다.
이렇게 흩어져 있던 족장들이 공동의 법을 만들고 분쟁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가 바로 알싱그였습니다. 930년 무렵 싱벨리어 들판에서 처음 열린 이 회의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 민주주의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이때부터 1262년까지 이어진 정치 체제를 역사가들은 ‘아이슬란드 자유국’ 혹은 ‘코먼웰스’라 부릅니다. 알싱그는 이후로도 형태를 바꾸어가며 1798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열렸고, 지금 그 들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싱벨리어 국립공원이 되어 있습니다.
판결은 있는데, 판결을 집행할 사람이 없다
알싱그가 하는 일은 오늘날의 의회나 법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매년 여름 두 주 남짓, 섬 곳곳의 자유민들이 싱벨리어에 모여 법을 정비하고 소송을 심리했습니다. 살인, 상해, 재산 분쟁 같은 사건에 대해 유죄와 무죄를 가리고, 손해배상이나 추방형 같은 판결을 내리는 절차도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판결이 내려져도 그것을 실제로 집행할 국가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섬 밖으로 추방하는 형이 확정되어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몫은 소송에서 이긴 쪽과 그 친족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습니다. 판결문 한 장을 손에 쥔 채, 상대의 재산을 직접 몰수하거나 상대를 직접 쫓아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아이슬란드 자유국을 두고 일종의 ‘무국가 사회’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법은 공동체가 함께 만들었지만, 그 법의 이빨은 결국 개인의 힘에 맡겨져 있었던 셈입니다.
이 방식이 300년 가까이 굴러갈 수 있었던 데에는 나름의 균형이 있었습니다. 초기 아이슬란드에는 크고 작은 고디가 여럿 있었고, 어느 한쪽도 다른 모두를 압도할 만큼 힘이 세지는 않았습니다. 힘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함부로 판결을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내가 판결을 어기면, 내일은 상대편 친족들이 힘을 모아 나를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수와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그리고 서로 얽힌 혼인과 친족 관계가 국가를 대신해 질서를 지탱하는 그물망 역할을 했습니다.
저울이 기울기 시작하다
이 균형은 12세기를 지나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에는 수십 개로 나뉘어 있던 고디의 직위가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유력 가문의 손에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사고, 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다른 족장의 지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소수의 가문이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손에 쥐었습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속한 스투를룽 가문도 이런 거대 가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힘이 여럿에게 고르게 나뉘어 있을 때는 사적 제재가 견제 장치로 작동했지만, 힘이 몇몇 거대 가문에만 쏠리자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서로 대등한 힘을 가진 소수의 가문들이 각자 사병에 가까운 무리를 거느린 채 부딪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13세기 초부터 벌어진 이 유혈의 시기를 아이슬란드 역사에서는 ‘스투를룽 시대’라 부릅니다. 가문 간의 다툼은 이제 한 해의 소송으로 끝나지 않고, 수백 명이 동원되는 전투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스노리는 이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나 알싱그의 법률 대변인을 지낸 명망가였고, 노르웨이 왕실과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관계가 그를 지켜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한때 호콘 왕에게 자신을 지원해주면 아이슬란드를 왕의 영향권 아래 두겠다고 약속했지만, 귀국 후 이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왕의 분노는 결국 그의 사촌 기수르를 통해 되돌아왔습니다. 왕이 아니라 사촌의 손에, 그것도 자신의 집 지하 저장고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당시 아이슬란드에 남아 있던 힘의 공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외부의 왕이 내부의 친족 갈등에 끼어들어 살인을 사주해도, 이를 막거나 벌할 상위의 권력이 섬 안에 없었던 것입니다.
거듭된 내전에 지친 아이슬란드의 족장들은 결국 1262년, 개별적으로 노르웨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오랜 계약’이라 불리는 이 서약과 함께 300년 넘게 이어진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막을 내리고, 섬은 노르웨이의 지배 아래로 편입되었습니다. 자치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초에 왕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의 후손이, 내부의 폭력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게 되자 결국 왕에게 다시 돌아간 셈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 서늘한 정의 하나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신의 강연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국가에 대한 정의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내린 정의는 이렇습니다. 국가란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실제로 관철시키는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법을 만드는 능력이나 다스리는 이념이 아니라, 폭력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는 권리를 오직 하나의 주체만이 갖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국가를 다른 조직과 구분 짓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이 정의를 아이슬란드 자유국에 대입해 보면 흥미로운 그림이 나옵니다. 아이슬란드에는 법이 있었고, 의회가 있었고, 판결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폭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권리는 특정한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소송에서 이긴 개인과 그 친족에게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베버의 기준으로 보면 아이슬란드 자유국은 정교한 사법 체계를 가진 사회이기는 했지만, 엄밀한 의미의 국가는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체제가 무너진 이유도 정확히 이 지점에 있었습니다. 폭력을 쓸 권리가 여럿에게 나뉘어 있는 한, 힘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그 사회는 내전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늘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홉스, 로크, 그리고 그 사이의 아이슬란드
이 지점에서 정치철학이 오랫동안 씨름해온 질문이 겹쳐집니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불렀습니다. 누구나 자신을 지킬 힘은 있지만 그 힘을 억제할 상위의 권위가 없다면, 결국 모두가 서로를 두려워하며 선제공격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홉스에게 국가는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인들이 자신의 폭력 사용권을 통째로 넘겨준 대가로 얻는 평화였습니다.
존 로크는 조금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는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를 홉스만큼 참혹하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원래부터 생명과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있고, 국가는 다만 이 권리를 더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 로크의 생각이었습니다. 국가가 오히려 그 권리를 침해한다면, 사람들에게는 저항할 권리마저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역사는 이 두 입장 사이 어딘가에 정확히 걸쳐 있습니다. 초기 3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사회는 국가 없이도 상당히 안정적으로 굴러갔습니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법을 만들고 분쟁을 조정했습니다. 이 점에서는 국가 없는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는 무정부주의적 낙관에 힘을 실어주는 사례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같은 체제는 순식간에 유혈 사태로 치달았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상위의 강제력 없이는 결국 폭력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홉스의 경고가 고스란히 들어맞습니다. 아이슬란드는 국가 없는 사회가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조건이 무너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함께 보여준 실험이었던 셈입니다.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이야기
유럽 대륙에서 근대 국가가 만들어진 과정을 연구한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전쟁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가 전쟁을 만들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프랑스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이웃 나라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세금을 걷을 관료 조직과 상비군을 갖추게 되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조직이 다시 다음 전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국가의 핵심 기능, 즉 세금과 군대와 관료제는 평화로운 시절이 아니라 생존을 건 전쟁의 압박 속에서 단련되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아이슬란드는 이 압박에서 상당히 비켜나 있었습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고,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는 외부 세력도 없었습니다. 굳이 상비군을 두고 세금을 걷어 왕을 먹여 살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리적 안전함이 아이슬란드가 300년 가까이 국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배경이었고, 동시에 노르웨이라는 힘 있는 이웃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이를 막아낼 조직된 힘이 전혀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국가 없는 세상을 다시 꿈꾸는 사람들
국가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은 중세 아이슬란드 정착민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실리콘밸리의 일부 투자자와 기술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네트워크 국가’라는 개념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영토 대신 온라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암호화폐로 재정을 운영하며, 궁극적으로는 특정 정부의 승인을 받아 독자적인 영토와 주권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공해상에 인공 섬을 세워 어느 나라의 법도 닿지 않는 자치 공동체를 만들자는 ‘시스테딩’ 운동도 한동안 상당한 투자를 끌어모았습니다.
이런 시도들이 공통으로 부딪히는 문제는 결국 아이슬란드가 겪었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여자들끼리 분쟁이 생겼을 때 누가 그것을 판결할 것인가, 판결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을 강제할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킬 물리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실제로 이런 프로젝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체적인 분쟁 조정 절차나 보안 인력, 심지어 독자적인 화폐 제도까지 다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라는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결국 국가가 원래 하던 일들을 하나씩 다시 발명하는 과정으로 흘러가는 셈입니다.
싱벨리어, 다시
지금 싱벨리어 국립공원을 찾는 여행자들은 대개 다른 이유로 이곳을 방문합니다. 유라시아판과 북아메리카판이 조금씩 서로 멀어지고 있는 균열, 그 지질학적 경관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초록빛 들판 위로 갈라진 바위틈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운데, 이 자리가 한때 왕도 군대도 경찰도 없이 법을 만들고 분쟁을 심리하던 자리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바로 그 법정에서 오갔던 판결들이 결국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지 못해 한 시인의 죽음과 왕에게 바친 충성 서약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들판이 오늘날에도 아이슬란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국가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 조직인지를 한 번쯤 되짚어보게 만듭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이슬란드 자유국(코먼웰스)은 정확히 언제 존재했나요?
930년 알싱그가 설립된 때부터 1262년 아이슬란드 족장들이 노르웨이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할 때까지, 약 330년간 존재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아이슬란드 자유국’ 또는 ‘코먼웰스’ 시대라 부릅니다.
스노리 스투를루손은 어떤 인물인가요?
12~13세기 아이슬란드의 시인이자 역사가, 정치가입니다. 두 차례 알싱그의 법률 대변인을 지냈고, 북유럽 신화를 정리한 『산문 에다』와 노르웨이 왕들의 역사를 다룬 『헤임스크링글라』 등을 남겼습니다. 노르웨이 왕과의 갈등 끝에 1241년 자택에서 암살당했습니다.
막스 베버가 말한 ‘폭력의 독점’이란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베버는 국가를 특정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조직으로 정의했습니다. 법을 만들거나 다스리는 능력보다, 폭력을 합법적으로 쓸 권리가 오직 하나의 주체에게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국가의 핵심 조건으로 본 것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나요?
아이슬란드 자유국의 사례는 국가 없이도 상당 기간 사회 질서가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 질서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작동했으며,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그 질서 역시 함께 무너졌습니다.
오늘날의 ‘네트워크 국가’나 ‘시스테딩’은 국가를 대체할 수 있나요?
현재까지는 실험적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시도들 역시 분쟁 조정과 강제력, 안보라는 국가의 핵심 기능이 필요해지면서 자체적으로 유사한 장치를 다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아, 국가 자체를 완전히 대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