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쇼펜하우어가 어두운 강의실에서 텅 빈 좌석을 바라보는 장면

쇼펜하우어는 왜 비관주의 철학자일까?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철학자의 첫인상

1820년, 독일 베를린 대학교의 어느 강의실. 서른두 살의 젊은 철학자가 자신만만하게 강의 시간표를 잡았습니다. 하필이면 당대 최고의 스타 교수, 헤겔의 강의와 정확히 같은 시간대로 말이죠.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헤겔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미어터졌지만, 이 젊은이의 강의실에는 겨우 몇 명만 앉아 있었습니다. 몇 주 뒤, 강의는 폐강되고 말았습니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훗날 니체가 “내 인생을 바꾼 단 한 권의 책”이라 극찬하고, 톨스토이가 “인류가 만든 최고의 천재”라 부르며,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세상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출간 후 몇 년이 지나도록 거의 팔리지 않았고, 재고는 결국 폐지로 팔려나갈 뻔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겁니다. 이렇게 철저히 실패한 인생을 산 사람이, 정작 “삶은 고통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는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쇼펜하우어를 그냥 ‘우울한 아저씨’, ‘염세주의자’로 치부하고 넘어갑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의 비관주의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매우 정교한 논리 구조를 가진 철학 체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왜 세상을 그렇게 어둡게 보았을까요?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말 그저 ‘우울증에 걸린 철학자의 넋두리’에 불과한 걸까요, 아니면 우리가 애써 외면해온 어떤 진실을 건드리고 있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의 삶 자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 이 질문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류가 끊임없이 던져온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 앞에서 어떻게든 희망적인 답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신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성이 우리를 진보시킬 것이다, 역사는 결국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식으로 말이죠.

쇼펜하우어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아니, 삶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이 맞다”고 정면으로 말한 최초의 주류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정직함이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너는 원래 행복해야 하는데 지금 불행한 건 네 잘못이야”라는 말보다, “삶이라는 게 원래 고통스러운 거야, 너만 유독 힘든 게 아니야”라는 말이 훨씬 더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번아웃, 무기력, 허무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다시 조명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우리가 고통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는 일이기도 합니다.

낙관의 시대에 등장한 반항아

쇼펜하우어가 활동하던 19세기 초 독일은 그야말로 ‘이성 만능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칸트가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재구성했고, 헤겔은 한술 더 떠서 “역사는 절대정신이 스스로를 실현해가는 필연적 과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쉽게 말해,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으며, 모든 고통과 전쟁과 혼란조차도 결국은 더 큰 진보를 위한 디딤돌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낙관론은 당시 지식인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사람들은 이성과 자유,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고, 헤겔의 철학은 이런 시대정신을 완벽하게 대변했습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모든 것에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는 헤겔을 가리켜 “정신을 병들게 하는 사이비 철학자”라 비난했고, 그의 철학을 “허풍으로 가득한 헛소리”라 평가절하했습니다. 자존심 강한 이 젊은 철학자가 헤겔과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개설한 것도, 어쩌면 “내가 당신보다 낫다”는 무언의 도전이었을지 모릅니다. 결과는 앞서 말했듯 처참한 패배였지만요.

여기서 짚고 넘어갈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당대 꽤 유명한 소설가였고, 괴테와도 친분이 있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어머니의 살롱에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드나들었죠. 하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최악이었습니다. 아들이 자신보다 유명해질까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아들과 크게 다투었고, 결국 두 사람은 남처럼 지내게 됩니다. 그의 대표작이 완성되었을 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네 책은 약사들이나 볼 책이구나.” (당시 철학책이 팔리지 않으면 종종 약을 포장하는 종이로 재활용되었기 때문에 나온 뼈있는 농담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탄생했습니다. 시대는 낙관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그는 정반대 방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정확히 무엇을 말했는가

왜: 세상의 본질은 ‘의지’다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은 이겁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계, 즉 눈앞의 책상이나 나무, 사람들의 얼굴 같은 것들은 사실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표상’이라 불렀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 두뇌가 만들어낸 이미지, 일종의 스크린에 비친 영상 같은 것이죠.

그렇다면 이 스크린 뒤에 있는 진짜 실체는 무엇일까요?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의지’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의지’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굳은 의지로 시험에 합격했다” 할 때의 그 의지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훨씬 더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힘, 즉 ‘살고자 하는 맹목적 충동’ 같은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것을 떠올려 보세요. 강물은 왜 흐를까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그냥 흐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흐르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흐를 뿐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본 세계의 본질, 즉 ‘의지’도 이와 비슷합니다. 목적도 없고, 끝도 없고, 그저 끊임없이 살고자 하고, 채우고자 하고, 뻗어나가려는 맹목적인 힘입니다.

어떻게: 의지는 어떻게 고통을 만들어내는가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 ‘의지’라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듭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원하고, 외로우면 사랑을 원하고, 가난하면 부를 원합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이 욕망의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분석합니다.

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첫째, 욕망은 결핍에서 나옵니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지금 그것이 없다는 뜻이고,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통입니다.

둘째, 욕망이 충족되면 어떻게 될까요? 잠시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 만족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원하던 것을 손에 넣는 순간, 우리는 그것에 곧 익숙해지고 지루함을 느낍니다. 새 차를 샀을 때의 설렘이 한 달만 지나면 사라지는 것처럼요. 그리고 곧 새로운 욕망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셋째, 만약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당연히 고통입니다.

이 구조를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상태쇼펜하우어의 설명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결핍의 고통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짧은 만족 후 곧바로 찾아오는 권태(지루함)
권태가 지속될 때새로운 욕망을 찾아 헤맴 → 다시 결핍으로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인간 삶의 근본 구조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배고픔(고통)을 채우면 배부름(권태)이 오고, 다시 새로운 배고픔이 찾아오는 식으로, 우리는 영원히 이 시계추 운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이것이 ‘비관주의’인가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나옵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발전하면 언젠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사회가 발전하면, 결국 인간은 결핍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었죠.

쇼펜하우어는 이 믿음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는 고통이 우연히 생기는 ‘결함’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본질’이라고 보았습니다. 배고픔을 없애면 외로움이 찾아오고, 외로움을 없애면 지루함이 찾아옵니다. 이 시계추는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계추를 움직이는 동력 자체가 ‘삶에 대한 맹목적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가 존재하는 한,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낙관주의자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합니다. “이 세상이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실은 이 세계가 최악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쁜 세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이 세상이 이미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니까요. 언뜻 들으면 극단적으로 느껴지지만,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나름의 정합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자살을 권하지 않았나

여기서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삶이 고통이라면,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정당화했겠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자살을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자살은 삶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의 한 형태라는 것이 그의 분석입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삶은 싫지만 지금 이 특정한 고통스러운 조건은 없애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살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진짜 해법이 ‘의지를 부정하는 것’, 즉 욕망 자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교와 힌두교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서양 철학자 중 최초로 동양 사상을 진지하게 자신의 철학 체계에 편입시킨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술을 통한 일시적 초월입니다.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감상할 때, 잠시나마 “내가 무엇을 원한다”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대상 자체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 순간만큼은 고통의 시계추가 멈춥니다. 쇼펜하우어가 유독 음악을 예술의 최고 형태로 꼽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음악은 언어나 이미지 없이도 ‘의지’ 그 자체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금욕과 연민을 통한 근본적 초월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고, 자신의 욕망을 의도적으로 절제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이 맹목적 의지의 힘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이는 불교의 해탈 개념과 매우 유사한 구조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삶 자체가 증명하는 이론

흥미롭게도, 쇼펜하우어의 삶 자체가 그의 이론을 몸소 증명하는 듯한 궤적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사람을 잘 믿지 못해 은식기를 도둑맞을까 걱재해 침대 밑에 장전된 권총을 두고 잤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이발사조차 믿지 않아, 면도는 늘 스스로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또한 극도로 예민한 성격으로도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이웃 여성과 다투다 그녀를 계단에서 밀쳤는데, 이로 인해 그녀가 다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법정 다툼 끝에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여성에게 생활비를 지급해야 했는데, 훗날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파가 죽으니 짐을 덜었다(Obit anus, abit onus)”는 라틴어 말장난을 남겼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그다지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일화들은 그가 이론적으로만 인간 삶의 고통을 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삶 속에서 온갖 결핍과 짜증, 불안을 몸소 겪은 인물이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말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비로소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60대에 접어든 어느 날, 그의 책이 갑자기 유럽 전역에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그를 찾아와 경의를 표했고, 그는 뒤늦게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뒤늦은 명성에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이 정도 명성이면 충분히 늦게 왔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평생 고통과 권태의 시계추를 논했던 철학자가, 정작 그토록 바라던 인정을 받는 순간에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은 묘하게 그의 철학과 맞아떨어집니다.

쇼펜하우어와 다른 철학자들은 무엇이 다른가

쇼펜하우어의 위치를 더 명확히 이해하려면, 비슷한 시기 또는 이후 철학자들과 비교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철학자세계를 보는 시각고통에 대한 해법
헤겔역사는 이성을 통해 진보한다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결된다
라이프니츠이 세계는 신이 만든 최선의 세계다고통조차 더 큰 선을 위한 일부다
쇼펜하우어삶의 본질은 맹목적 의지이며 고통이다예술적 몰입과 욕망의 절제(금욕)
니체삶은 고통스럽지만 그 자체를 긍정해야 한다고통을 부정하지 말고 극복하며 나아가라(초인 사상)

특히 니체와의 비교가 흥미롭습니다. 니체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열렬한 신봉자였습니다. 니체는 우연히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발견해 읽고는 “지금까지 이렇게 정직한 책을 본 적이 없다”며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니체는 스승의 결론에 반기를 듭니다. “그래, 삶은 고통이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욕망을 버리고 금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은 틀렸다. 오히려 그 고통까지도 끌어안고 삶을 더 강렬하게 긍정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반론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니체의 ‘초인’과 ‘영원회귀’ 사상이 탄생하게 됩니다. 즉,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가 없었다면 니체의 철학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스승을 딛고 넘어선 제자였던 셈이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200년 전 이 우울한 철학자의 생각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 그의 철학은 ‘고통에 대한 정직함’을 가르쳐줍니다. SNS에는 온통 행복하고 성공한 모습들만 넘쳐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나만 힘든가?”, “나만 이렇게 불행한가?”라는 자책에 빠지기 쉽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니, 삶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고통과 권태의 반복이다. 당신이 특별히 잘못 살고 있어서가 아니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큰 위안이 됩니다.

둘째,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인의 소비 습관을 성찰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최신 스마트폰을 샀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오래갔는지 떠올려 보세요. 새로운 물건, 새로운 성취는 잠깐의 만족을 줄 뿐, 곧 다시 권태가 찾아오고 우리는 다음 욕망을 찾아 나섭니다. 쇼펜하우어의 통찰은 오늘날 ‘미니멀리즘’이나 ‘욕망을 줄이는 삶’을 지향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셋째, 예술과 몰입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해줍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자연 속을 걷는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 순간에 존재하게 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말하는 ‘몰입(flow)’ 상태와도 상당히 유사한 개념을 쇼펜하우어는 이미 200년 전에 이야기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극단적인 결론, 즉 ‘욕망을 완전히 소거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던진 질문, “왜 우리는 만족을 얻어도 곧 다시 결핍을 느끼는가”라는 질문만큼은 여전히 곱씹어볼 가치가 있습니다.

핵심 정리

  •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을 ‘표상’ 너머의 ‘의지’, 즉 맹목적으로 살고자 하는 힘으로 보았습니다.
  • 이 의지는 끊임없는 욕망을 만들어내고, 욕망은 결핍(고통)과 충족 후의 권태 사이를 오가게 만듭니다.
  • 이 구조가 삶의 본질이기에, 그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비관주의 철학자’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 그럼에도 그는 자살을 반대했으며, 예술적 몰입과 욕망의 절제(금욕)를 통한 일시적·근본적 초월을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 그의 철학은 니체를 비롯한 후대 철학자들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번아웃과 허무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여러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오늘의 한 문장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삶을 견디는 첫걸음이다.”

FAQ

Q1. 쇼펜하우어는 왜 비관주의 철학자로 불리나요? 그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로 규정하고, 이 의지가 끊임없는 욕망과 결핍, 그리고 충족 후의 권태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고 보았습니다. 이 구조가 삶의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에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이 때문에 비관주의 철학자로 분류됩니다.

Q2.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옹호했나요? 아니요, 오히려 반대했습니다. 그는 자살이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고통스러운 조건만을 회피하려는 행위이며, 여전히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의 한 형태라고 분석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해법은 욕망 자체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금욕적 태도였습니다.

Q3.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어떤 관계인가요? 니체는 젊은 시절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 스승의 금욕적 결론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니체는 삶이 고통스럽다는 진단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끌어안고 긍정해야 한다는 ‘초인’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Q4.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은 무엇인가요? 가장 대표적인 저작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세계를 ‘표상(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과 ‘의지(세계의 본질적 실체)’로 나누어 설명하며, 이를 바탕으로 그의 비관주의적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Q5. 쇼펜하우어 철학은 불교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자 중 최초로 불교와 힌두교 사상을 자신의 철학 체계에 깊이 받아들인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가 제시한 ‘의지의 부정을 통한 초월’이라는 해법은 불교의 해탈이나 욕망의 소멸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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