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미스터리

셰익스피어는 정말 그 사람이었을까? — 400년째 풀리지 않은 문학사 최대의 의혹

1785년 무렵, 영국 워릭셔의 한 시골 목사가 은밀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제임스 윌모트. 그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을 중심으로 반경 80킬로미터 안에 있는 모든 저택과 도서관을 하나씩 찾아다녔습니다. 목적은 단 하나,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남긴 흔적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편지 한 장, 책 한 권, 메모 한 줄이라도 좋았습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그 지역의 서재를 뒤졌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널리 읽히고 가장 많이 공연된 작가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주인이 정말 그 작품들을 썼는지를 두고, 지난 두 세기 동안 학자와 배우와 작가들이 진지하게 논쟁을 벌여 왔다는 사실은 뜻밖으로 다가옵니다. 마크 트웨인도, 헬렌 켈러도,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이 의심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2007년에는 셰익스피어 전문 배우로 명성을 쌓은 데릭 저코비와 마크 라일런스가 나서서, 저자 문제를 정식 학문적 의제로 다뤄야 한다는 청원에 서명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제프리 러시나 마이클 요크 같은 배우들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 글은 그 의혹이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누가 진짜 저자로 지목되었으며, 그 주장들이 왜 무너지는지, 그리고 정작 이 논쟁 자체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따라가 봅니다.

그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이유

윌모트 목사가 서재를 뒤지고도 빈손으로 돌아온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개인 기록은 지나칠 만큼 적습니다. 세례, 결혼, 자녀 출생, 부동산 거래, 그리고 약제사에게 빚을 갚으라며 낸 소송 서류 정도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정작 그가 대학에 다녔다는 기록도, 개인 서재를 소유했다는 기록도, 다른 작가에게 보낸 편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언장에는 침대와 가구, 은식기를 물려준다는 내용만 있고, 책이나 원고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더 눈에 띄는 문제는 필적입니다. 셰익스피어의 서명은 지금까지 여섯 개만 남아 있는데, 그마저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흘려 쓰여 있어 같은 사람의 글씨인지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어떤 문서에는 ‘Shaxberd’로, 어떤 문서에는 ‘Shakspere’로 적혀 있습니다. 부모인 존 셰익스피어와 메리 아든은 서명 대신 표식을 남겼는데, 이는 두 사람이 글을 쓸 줄 몰랐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스트랫퍼드는 인구 1,500명 남짓의 양모 거래 시장 마을이었고, 셰익스피어가 다녔다고 추정되는 문법학교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1585년부터 1592년까지, 이른바 ‘잃어버린 시절’이 겹칩니다. 이 7년 동안 그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공백이 끝나자마자, 로마 신화와 이탈리아 궁정 예법, 법률 용어와 항해술까지 능숙하게 다루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시골 장갑 장수의 아들이 그런 지식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회의론자들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들었습니다.

용의자들의 등장

이 의심에 처음으로 체계적인 형태를 부여한 사람은 미국인 델리아 베이컨이었습니다. 1857년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스트랫퍼드의 상인이 그토록 정교한 정치철학과 왕실 내부 사정을 알았을 리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지목한 것은 자신과 같은 성을 쓰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그리고 월터 롤리 경을 포함한 지식인 집단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베이컨 학파’라 불리는 사람들은 희곡 속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서명이 암호로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암호 찾기는 20세기 초까지 하나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베이컨 학파의 열기가 식어 갈 무렵, 새로운 후보가 등장했습니다. 1920년, 영국의 교사 J. 토마스 루니는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밝히다』라는 책에서 옥스퍼드 백작 17대, 에드워드 드 비어를 지목했습니다. 드 비어는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궁정과 외교의 내막을 훤히 꿰고 있었습니다. 루니는 드 비어의 삶이 『햄릿』이나 『끝이 좋으면 다 좋다』의 등장인물과 겹친다고 보았고, 드 비어 자신이 젊은 시절 시를 발표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절필했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시점은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첫 시집이 나온 1593년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가 있습니다. 말로는 1593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술집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부 회의론자들은 이 죽음이 사실은 정부 첩보 활동에 연루된 그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었으며, 이후 그가 가명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을 계속 써 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 후보 외에도 헨리 네빌 경, 심지어 엘리자베스 여왕 본인까지, 지금까지 거론된 대체 저자 후보는 80명이 넘습니다.

죽은 사람은 글을 쓸 수 없다

이 후보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옥스퍼드 백작 드 비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있습니다. 드 비어는 1604년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정통 연대기에 따르면 『맥베스』, 『리어왕』, 『템페스트』를 포함한 열두 편 넘는 작품이 그가 죽은 뒤에 쓰였습니다. 특히 『템페스트』는 1609년 버뮤다 해역에서 실제로 벌어진 난파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정황이 뚜렷한데, 그 사건이 벌어진 해에 드 비어는 이미 5년째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옥스퍼드파 학자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정통 연대기 자체가 틀렸다고 반박합니다. 후기작으로 분류된 작품들이 실제로는 훨씬 이른 시기에 쓰였고, 드 비어가 살아 있는 동안 완성해 두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반박은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그렇게 되면 셰익스피어의 문체와 사상이 수십 년에 걸쳐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극단 배우 명단이나 공연 기록, 인쇄업자들의 등록 문서에 남은 연대와도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드 비어를 저자로 세우려면, 서로 다른 종류의 기록들을 한꺼번에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셈입니다.

반대편에 놓인 증거들

의혹을 제기하는 쪽의 논리가 ‘없음’을 근거로 삼는다면, 정통 학계의 논리는 ‘있음’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 있음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1598년, 프랜시스 미어스라는 작가는 『팔라디스 타미아』라는 책에서 셰익스피어를 희극과 비극 모두에 능한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꼽으며, 그의 작품 열두 편을 구체적으로 나열했습니다. 이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이미 런던 문단 안에서 실존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더 결정적인 증거는 그의 사후에 나왔습니다. 1623년, 동료 배우였던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서른여섯 편을 묶어 ‘퍼스트 폴리오’라는 전집을 펴냈습니다. 이 책의 서문에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로 꼽히던 벤 존슨이 쓴 헌사가 실려 있습니다. 존슨은 이 헌사에서 셰익스피어를 ‘에이번의 다정한 백조’라 부르며 애정 어린 찬사를 남겼는데, 존슨은 다른 지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라틴어 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진짜 지인만이 남길 수 있는, 존경과 솔직함이 뒤섞인 평가였습니다. 스트랫퍼드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는 셰익스피어가 세상을 떠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세워진 흉상이 있는데, 이 흉상 아래 새겨진 비문 역시 그를 극작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당대 최고 학자로 꼽히는 셰익스피어 연구자들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셰익스피어가 개인 서재나 편지를 남기지 않은 것은 그 혼자만의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크리스토퍼 말로도, 토머스 키드도, 개인 원고나 서재 목록을 거의 남기지 못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함께 극작을 했던 동료 존 플레처의 필적조차 지금까지 확실하게 남아 있는 것이 몇 점 되지 않습니다. 인쇄술이 갓 자리 잡던 시대, 극작가라는 직업은 지금처럼 존중받는 지식인의 자리가 아니라 유랑 극단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고, 그런 사람들의 사적 문서가 살아남을 확률은 애초에 낮았습니다.

후보핵심 근거결정적 약점
프랜시스 베이컨방대한 학식, 정치·법률 지식문체가 셰익스피어와 뚜렷이 다름, 암호설은 학계에서 대부분 기각됨
에드워드 드 비어(옥스퍼드 백작)귀족 교육, 궁정 경험, 절필 시점의 일치1604년 사망 — 이후 작품 다수의 창작 연대와 충돌
크리스토퍼 말로뛰어난 극작 실력, 의문의 죽음사망 자체가 검시 기록으로 확인됨, 위장설은 물증 없음

사람들은 왜 의심하고 싶어 했을까

이 논쟁을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있습니다. 증거의 무게가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어째서 이토록 오랫동안, 이토록 많은 지식인들이 반대편에 섰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논리 이전의 감정이 섞여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지식인 사회에는, 그토록 깊은 통찰과 궁정 정치에 대한 이해를 담은 작품을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한 지방 상인이 썼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서가 있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의심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스스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는 점은, 이 논쟁이 순수하게 문헌학적인 다툼만은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반면 이 시각에도 반론은 있습니다. 저자 문제를 제기해 온 이들 중에는 언어학자와 통계학자, 법률가들도 포함되어 있고,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 제기가 계급적 편견이 아니라 문헌 증거에 대한 정당한 회의라고 반박합니다.

셰익스피어 생가 재단을 비롯한 주류 학계는 이 논쟁 자체를 진지한 학문적 쟁점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퍼스트 폴리오와 동시대인들의 증언, 인쇄 기록이라는 세 갈래 증거가 겹치는 이상, 저자를 둘러싼 의문은 이미 해소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논쟁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는, 증거의 문제라기보다 이야기의 매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신원을 숨긴 천재, 감춰진 암호, 400년 된 미제 사건. 이런 요소들은 어떤 확실한 답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둡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글은 제임스 윌모트 목사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가 스트랫퍼드 주변의 서재를 뒤지고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셰익스피어 저자 논쟁의 기원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1932년, 어느 문헌학자가 180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사본 하나를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그 안에는 제임스 코턴 코웰이라는 인물이 입스위치 철학회에서 발표한 강연 원고가 담겨 있었고, 코웰은 그 안에서 윌모트가 자신에게 직접 들려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서 덕분에 윌모트는 셰익스피어를 의심한 최초의 인물로 학계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2010년, 셰익스피어 연구자 제임스 샤피로는 이 필사본을 다시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문서에 쓰인 어휘와 표현 방식 가운데 일부가, 1805년에는 존재할 수 없었던 19세기 후반의 용어였습니다. 입스위치 철학회라는 단체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기록도, 코웰이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는 기록도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문서는 20세기 초, 베이컨 학파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누군가가 꾸며 낸 위작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글의 첫 장면 자체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둘러싼 의심의 역사는, 그 시작점에서부터 진짜와 만들어진 이야기가 뒤섞여 있었던 셈입니다. 스트랫퍼드의 트리니티 교회에는 지금도 400여 년 전에 세워진 그의 흉상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방문객들이 매년 수십만 명씩 다녀갑니다. 그 흉상이 내려다보는 것은 확정된 답이 아니라, 여전히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눈빛인지도 모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셰익스피어의 정확한 생몰년도는 언제인가요?

세례 기록에 따르면 1564년 4월 26일에 세례를 받았고, 사망일은 1616년 4월 23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출생일 자체는 세례일을 근거로 추정된 것이며, 정확한 생일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퍼스트 폴리오란 무엇인가요?

1623년, 동료 배우 존 헤밍과 헨리 콘델이 펴낸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입니다. 서른여섯 편의 희곡이 실려 있으며, 이 중 절반가량은 이 책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작품들입니다.

주류 학계의 공식 입장은 무엇인가요?

셰익스피어 생가 재단을 포함한 대다수 학술 기관은 저자 논쟁을 근거가 부족한 가설로 봅니다. 동시대 기록과 퍼스트 폴리오, 벤 존슨을 비롯한 지인들의 증언이 스트랫퍼드의 셰익스피어를 저자로 명확히 가리킨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2007년 ‘합당한 의심 선언’은 무엇인가요?

배우 데릭 저코비와 마크 라일런스가 주도한 청원으로, 저자 문제를 정식 학문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배우와 학자가 서명했지만, 이 선언이 학계의 공식 견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에드워드 드 비어가 저자라는 주장은 왜 힘을 잃었나요?

그가 1604년에 사망했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템페스트』를 포함해 그의 사후에 쓰인 것으로 확인되는 작품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에, 창작 연대를 통째로 재조정하지 않는 한 이 이론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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