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사회는 가능할까?
낯선 배를 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눈을 뜨면 당신이 어떤 나라에 태어날지, 부잣집 아이일지 가난한 집 아이일지, 남자일지 여자일지, 몸이 건강할지 장애를 갖고 태어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곧 어딘가에 도착해 그 사회의 규칙에 따라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습니다. 이제 딱 하나의 질문이 주어집니다.
“당신이 어떤 처지로 태어날지 모른다면, 이 사회의 규칙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이 질문을 처음 던진 사람은 20세기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였습니다. 그는 이 상상 속 장치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 하나가 이후 반세기 동안 정치철학의 흐름을 통째로 바꿔 놓았습니다. 왜 하필 이 질문이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이미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고 나서야 정의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유를 강조하고, 가난한 사람은 평등을 강조합니다. 강자는 경쟁을 옹호하고, 약자는 보호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정하게 하면 어떨까요. 그 규칙이야말로 누구도 억울하지 않은, 진짜 정의로운 규칙이 아닐까요.
왜 정의는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되었을까
정의라는 단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문제입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에서도, 조선의 암행어사가 마패를 들고 나설 때도, 오늘 아침 뉴스에 나온 세금 개편안을 두고서도 사람들은 똑같은 질문을 반복합니다. 무엇이 공정한가. 그런데 이 질문이 유독 답을 내기 어려운 이유는, 정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책 『국가』에서 정의를 개인의 영혼과 국가의 구조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그렸습니다. 이성이 지혜를 담당하는 통치자를, 기개가 용기를 담당하는 수호자를, 욕망이 생산을 담당하는 생산자를 각각 맡아 제자리를 지킬 때 사회는 정의롭다고 보았습니다. 언뜻 아름다운 그림 같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누가 통치자가 되고 누가 생산자로 남을지, 그 자리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전제입니다. 플라톤의 정의는 질서의 정의였지, 기회의 정의는 아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금 다른 길을 갔습니다. 그는 정의를 ‘각자에게 마땅한 몫을 주는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문제는 그 마땅한 몫을 무엇으로 잴 것인가였습니다. 능력으로 잴 것인지, 필요로 잴 것인지, 기여로 잴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사회가 만들어집니다. 이 세 가지 잣대는 지금도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논쟁의 뿌리입니다. 회사에서 성과급을 나눌 때, 대학이 신입생을 뽑을 때, 정부가 복지 예산을 편성할 때, 우리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이 저울 위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먼저 볼 것인가, 평등을 먼저 볼 것인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두 개의 큰 축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두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평등한 결과를 지향하는 흐름입니다.
애덤 스미스 이후 자유주의 전통은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와 개인의 재산권을 정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이 전통을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인물이 미국 철학자 로버트 노직입니다. 그는 1974년에 낸 책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아주 도발적인 사고 실험을 제시합니다. 농구 스타 윌트 체임벌린이 경기당 25센트씩 팬들에게 자발적으로 받기로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시즌이 끝나자 그는 백만 명이 넘는 관중이 자발적으로 지불한 돈 덕분에 순식간에 큰 부자가 됩니다. 노직은 묻습니다. 이 과정 어디에도 강제나 사기는 없었는데, 이 결과를 두고 국가가 나서서 재분배해야 할 정도로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요. 그의 답은 명확했습니다. 정당한 취득과 정당한 이전을 거쳤다면, 그 결과가 아무리 불평등해 보여도 그것은 정의로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노직에게 정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었습니다.
반대편에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서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유로운 거래라는 것 자체가 허구에 가깝습니다. 자본을 가진 사람과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는 사람이 ‘자유롭게’ 계약을 맺는다는 말은,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규칙을 적용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이 관점은 정의를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로 바라봅니다.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그 절차가 아무리 깨끗해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롤스의 답, 그리고 그 답이 흔들어 놓은 것들
바로 이 지점에서 존 롤스가 등장합니다. 그는 1971년 『정의론』을 출간하며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사이의 오래된 논쟁에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무지의 베일이 바로 그 해법의 핵심 장치입니다.
롤스는 무지의 베일 뒤에서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면 두 가지 원칙에 합의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첫째,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최대한의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둘째,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허용되려면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 불평등이 공정한 기회균등 아래에서 생겨난 것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차등의 원칙’이라 부릅니다.
이 두 번째 원칙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롤스는 불평등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천재 경영자의 성공이 사회 전체의 부를 키워서 최빈곤층의 삶까지 함께 나아지게 만든다면, 그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소수의 부가 늘어나는데 최하위 계층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 불평등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됩니다. 왜 하필 최약자의 처지를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무지의 베일 뒤에서는 내가 그 최약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규칙을 정한다면, 누구도 최악의 상황에서 버림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롤스의 이론은 발표되자마자 정치철학계를 뒤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거센 반론도 쏟아졌습니다. 노직은 곧바로 롤스를 반박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노력의 결과물을 국가가 재분배 명목으로 가져가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맞섰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세금은 노동의 강제 징발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까지 사용했습니다.
공동체는 어디로 갔는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또 다른 반박이 나옵니다. 마이클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은 롤스의 이론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 있는 인간이란 가족도, 문화도, 역사도, 소속된 공동체도 없는 텅 빈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특정한 언어, 특정한 전통, 특정한 관계 속에 놓입니다. 그런 맥락을 완전히 지워버린 채 정의를 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상상 실험에 불과하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샌델은 2009년 하버드 대학교 강의를 바탕으로 낸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 문제를 시장에서 판매되는 재화의 종류로 풀어냅니다. 그는 어떤 것들은 돈으로 사고파는 순간 그 본질이 변질된다고 말합니다. 신장 매매, 대리 출산, 병역 대체복무를 돈으로 사는 것이 논란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시장의 논리만으로는 정의를 완성할 수 없고,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가치와 미덕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결론이었습니다.
표로 정리하는 정의의 네 갈래
| 관점 | 대표 사상가 | 정의의 핵심 기준 | 대표적 정책 사례 |
|---|---|---|---|
| 공리주의 | 제러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 사회 전체의 행복 총량 극대화 | 다수를 위한 공공사업, 비용편익 분석 |
| 자유지상주의 | 로버트 노직 | 취득과 이전 과정의 정당성 | 낮은 세율, 최소 국가, 자유시장 |
|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 존 롤스 | 최약자에게 유리한 불평등만 허용 | 누진세, 기초생활보장, 기회균등 정책 |
| 공동체주의 | 마이클 샌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 공동체의 미덕과 맥락 | 병역 의무, 문화유산 보호, 지역 공동체 지원 |
오늘 우리 곁의 정의 논쟁
이 오래된 철학 논쟁은 교과서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지역균형 선발이나 사회적 배려자 전형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질문의 현대판입니다. 능력만으로 뽑아야 하는가, 아니면 출발선의 차이를 보정해야 하는가.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백신을 누구에게 먼저 배정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염 위험이 큰 노인을 먼저 보호할 것인가, 사회 필수 기능을 담당하는 젊은 의료진을 먼저 보호할 것인가는 공리주의와 롤스식 최약자 우선 원칙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현장이었습니다.
기본소득 논의 역시 이 틀 안에서 읽으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노직의 후예들은 기본소득을 근로 의욕을 꺾는 강제 재분배로 봅니다. 롤스의 후예들은 기본소득이야말로 무지의 베일 뒤에서 누구나 합의할 최소한의 안전망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이 촉발한 일자리 변화가 이 논쟁에 새로운 무게를 더하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이 채용과 대출 심사를 대신하는 시대가 되면서, 공정성이라는 단어는 이제 철학 강의실뿐 아니라 개발자들의 코드 리뷰 회의에서도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
많은 사람이 정의를 ‘모두가 똑같이 나누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롤스조차 완전한 평등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요구한 것은 불평등이 정당화되려면 최약자에게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또 하나 흔한 오해는 자유지상주의가 약자에게 무관심하다는 단정입니다. 노직 역시 자발적인 기부나 상호부조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반대한 것은 국가가 강제로 걷어 재분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정의를 둘러싼 논쟁은 선인과 악인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가진 합리적 입장들의 충돌에 가깝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정말 가능한가
그렇다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가능할까요. 지난 수천 년의 논쟁이 보여주는 답은 하나의 완성된 정답이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질문 그 자체에 가깝습니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로, 노직에서 롤스로, 롤스에서 샌델로 이어진 흐름은 매번 이전 답의 빈틈을 메우며 나아갔습니다. 아마 정의로운 사회란 도달해서 멈추는 목적지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는 상태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세금 제도가 바뀔 때마다, 입시 제도가 개편될 때마다, 우리는 이미 이 오래된 철학자들의 대화에 한 문장씩 보태고 있는 셈입니다.
핵심 요약
- 정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가 아니라 능력, 필요, 기여, 자유, 평등이라는 여러 잣대로 갈라진다
- 노직은 취득과 이전의 정당한 과정을, 롤스는 최약자를 배려하는 결과를 정의의 기준으로 삼았다
- 롤스의 무지의 베일은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 규칙을 정하자는 사고 실험이다
- 샌델을 비롯한 공동체주의자들은 개인을 둘러싼 맥락과 공동체의 미덕을 정의 논의에 다시 불러왔다
- 입시 제도, 백신 배분, 기본소득,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오늘의 논쟁 대부분이 이 철학적 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늘의 한 문장: 정의로운 사회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질문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해진다.
FAQ
Q1. 롤스의 무지의 베일이란 정확히 무엇인가요? 자신이 어떤 사회적 지위, 재산, 성별, 건강 상태로 태어날지 전혀 알 수 없는 가상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서 합리적인 사람이 사회의 규칙을 정한다면 가장 공정한 규칙에 합의할 것이라는 사고 실험입니다.
Q2. 롤스와 노직의 차이는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노직은 결과가 아무리 불평등해도 과정이 정당했다면 정의롭다고 보았고, 롤스는 과정이 정당해도 최약자에게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불평등은 정의롭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Q3. 공리주의는 왜 비판받나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행복의 총량만 따지면 소수의 권리가 쉽게 무시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꼽힙니다.
Q4.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은 롤스와 어떻게 다른가요? 샌델은 개인을 공동체와 분리된 존재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정의를 개인의 권리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미덕의 문제로 확장했습니다.
Q5. 기본소득은 어떤 정의론에 가까운가요? 롤스의 차등의 원칙과 맞닿아 있습니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자신이 최약자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 최소한의 안전망에 합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