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고야는 왜 인간의 가장 어두운 모습을 그렸을까?
자기 집 벽에 괴물을 그린 남자
1819년, 은퇴한 한 노인이 마드리드 근교의 시골집을 한 채 샀습니다. 사람들은 그 집을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전 주인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새로 이사 온 이 노인 역시 오래전부터 귀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고야. 한때 스페인 왕실의 수석 궁정화가였고,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그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은 그 집의 식당 벽과 거실 벽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팔려고 그린 것도,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그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극소수의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자기 집 벽에, 그는 자기 아들을 뜯어먹는 사투르누스를, 마녀들의 검은 잔치를, 몽둥이를 들고 서로를 후려치는 두 남자를, 초점 잃은 눈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개 한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에는 제목도, 서명도,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들을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궁정화가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그것도 팔지도, 전시하지도 않을 그림을, 자기 집 벽에, 그것도 식사를 하는 방 바로 옆에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 예술가의 개인사를 넘어 전쟁과 질병과 계몽주의가 한 인간의 눈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리고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왜 항상 예술의 최종 목적이 아니었는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우리는 흔히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기대합니다. 화사한 색채, 우아한 인물, 눈을 즐겁게 하는 풍경. 그런데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 꼽히는 인물 중 한 명이, 경력의 후반부 전체를 전쟁의 참상과 인간의 광기, 탐욕과 폭력을 그리는 데 바쳤다는 사실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고야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그가 그림을 잘 그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미술의 역할 자체를 바꿔놓았습니다. 그 이전까지 회화는 대체로 권력자를 찬양하거나, 종교적 교훈을 전달하거나, 신화 속 아름다운 순간을 재현하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고야는 그림으로 ‘고발’을 하기 시작합니다. 왕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심지어 못생기고 우둔해 보이게 그렸고, 전쟁을 영웅담이 아니라 도살장처럼 그렸습니다. 이 태도는 이후 마네, 피카소, 오토 딕스 같은 화가들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계보를 만들어냈습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이해하려면 고야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미술사가들이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계몽주의의 아이가 전쟁을 만나다
고야는 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소박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도금업자였고, 어린 고야는 신동은 아니었지만 성실했습니다. 20대에 마드리드로 상경한 그는 궁정 태피스트리(직물벽화) 공장의 밑그림 화가로 일하며 실력을 쌓았고, 30대 후반에는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라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이 시기 그는 계몽주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이성과 과학, 미신의 타파를 주장하던 볼테르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의 책을 스페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몰래 돌려 읽던 시절이었죠. 스페인은 당시 유럽에서도 유독 종교재판소의 힘이 강했고, 미신과 마녀사냥이 여전히 살아있는 나라였습니다. 계몽된 지식인이었던 고야는 이런 스페인 사회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792년,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 벌어집니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심각한 병(납중독설, 매독설, 뇌염설 등 여러 가설이 있지만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을 앓은 뒤, 그는 완전히 청력을 잃습니다. 40대 중반,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히 활동해야 할 시기에 그는 갑자기 소리가 사라진 세계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된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고, 대신 자신의 내면과 관찰력에 더 깊이 몰두하게 됩니다. 청력을 잃은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는 대신 시각적 관찰이 극도로 예민해졌다고 전해집니다. 사람들의 표정, 몸짓, 눈빛의 미세한 변화를 남들보다 훨씬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여기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1808년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침공한 것입니다. 이른바 ‘반도전쟁(스페인 독립전쟁)’이 시작되었고, 고야는 이 전쟁의 참상을 마드리드에서 직접, 눈앞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이웃이 이웃을 밀고하고, 점령군이 민간인을 즉결 처형하고,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거리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는 화가의 눈으로, 그러나 그 어떤 화가도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담아내기 시작합니다.
고야의 붓끝이 향한 세 개의 어둠
첫 번째 어둠: 전쟁이라는 이름의 도살
전쟁 이전까지 회화 속 전쟁은 대체로 ‘영웅담’이었습니다. 승리한 장군은 말 위에서 늠름하게, 전투는 웅장한 구도로 그려졌습니다. 죽음조차 고귀하고 아름답게 미화되었죠.
고야는 이 관습을 완전히 깨뜨립니다. 그가 전쟁 중과 직후에 제작한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는 총 82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는 영웅도, 승리도, 웅장함도 없습니다. 대신 나무에 묶여 거세당하는 남자, 시체로 산을 이룬 들판,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 침략군을 향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학살당하는 민간인들이 등장합니다. 한 판화에는 이런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였나(Para esto).” 그림 속에는 나무에 매달려 훼손된 시신이 있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진짜 얼굴이라고, 그는 담담하게, 그러나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이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판화가 아니라 유화입니다. 바로 ‘1808년 5월 3일’입니다. 이 그림에는 프랑스군의 총살형 집행 장면이 담겨 있는데, 중앙에는 흰 셔츠를 입은 한 남자가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습니다. 이 자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자세를 그대로 빌려온 것입니다. 그는 이 무명의 스페인 민중을 순교자로 그려낸 것입니다. 반면 총을 겨누는 프랑스 병사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얼굴 없는 폭력 그 자체로 그려집니다. 이 그림은 이후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을 규탄하는 그림의 원형이 여기서 탄생한 것입니다.
두 번째 어둠: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전쟁을 그리기 전, 고야는 이미 인간 사회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판화 연작 ‘변덕(Los Caprichos)’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작품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El sueño de la razón produce monstruos).” 그림 속에는 책상에 엎드려 잠든 한 남자 주위로 부엉이와 박쥐 같은 괴생명체들이 몰려드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한 장의 그림에 고야의 세계관 전체가 압축되어 있다고 미술사가들은 말합니다. 인간이 이성을 놓아버리는 순간, 미신과 광기와 폭력이라는 괴물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이죠. 그가 살았던 스페인은 여전히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존재했고, 무지한 성직자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였습니다. 계몽주의자였던 고야에게 이것은 ‘이성이 잠든 사회’의 증거였습니다.
세 번째 어둠: 자기 집 벽에 그린 절망 — 검은 그림
앞서 소개한 ‘귀머거리의 집’ 벽화, 이른바 ‘검은 그림(Pinturas negras)’ 연작은 고야가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 73세 무렵에 그린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력을 잃은 지 이미 30년 가까이 흐른 뒤였고, 전쟁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목격한 지도 십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스페인은 자유주의자와 절대왕정 지지자 사이의 극심한 정치적 탄압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고야 자신도 종교재판소의 감시 대상이 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이 연작 중 가장 강렬한 작품이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로마 신화 속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자식에게 왕좌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자기 아이들을 차례로 삼켜버리는 신입니다. 고야는 이 신화를 그야말로 끔찍하게, 눈이 뒤집힌 채 이미 목이 잘린 자식의 몸통을 움켜쥐고 뜯어먹는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미화나 상징적 처리 없이, 그야말로 날것의 공포로 그려낸 것입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요?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사투르누스는 곧 ‘시간’이자 ‘권력’이며,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행위는 자신이 만든 세대, 자신이 세운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인간 사회의 본성에 대한 은유라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 목격한 조국 스페인의 모습, 즉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학살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다음 세대의 희망을 짓밟는 모습이 이 한 장의 그림에 응축되어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 그림들에는 판매 목적도, 관객도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고백이자 절규였던 셈입니다.
궁정화가가 그린 ‘못생긴’ 초상화
고야가 얼마나 진실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1800년, 카를로스 4세와 그 가족의 대형 단체초상화를 의뢰받아 그립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이라는 이 그림은 얼핏 보면 화려한 궁정 초상화 같지만, 미술사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오랫동안 흥미로운 의문을 제기해왔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과 자세가 하나같이 어딘가 어색하고, 심지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왕비 마리아 루이사는 화면 정중앙에 배치되어 마치 실질적 권력자처럼 보이고, 왕은 뒤로 살짝 물러난 자세로 다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당대 프랑스의 한 비평가는 이 그림을 두고 “복권에 당첨된 빵집 가족 같다”고 비꼬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카를로스 4세는 이 그림을 보고 매우 만족했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색하게 그려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죠. 고야는 권력자의 실체—허영심과 어리석음, 진짜 권력관계—를 초상화라는 형식 뒤에 숨겨서 폭로하는 데 성공한 셈입니다. 아첨하는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고발장이었던 것입니다. 이 일화 하나만으로도 고야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를 그리는 화가였다는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이전 화가들과 고야는 무엇이 달랐나
| 구분 | 고야 이전의 전통 회화 | 고야의 접근 |
|---|---|---|
| 전쟁을 그리는 방식 | 승리한 영웅과 웅장한 전투 장면 강조 | 민간인 학살, 시체, 고통을 있는 그대로 기록 |
| 권력자 초상화 | 이상화하고 미화 | 있는 그대로, 때로는 우둔하고 나약하게 표현 |
| 그림의 목적 | 찬양, 장식, 교훈 전달 | 고발, 기록, 개인적 성찰과 절규 |
| 대중과의 관계 | 판매와 전시를 전제로 제작 | ‘검은 그림’ 연작은 관객 없이 자신만을 위해 제작 |
| 다루는 감정 | 숭고함, 아름다움, 경건함 | 공포, 광기, 절망, 폭력 |
이 표에서 알 수 있듯, 고야는 회화의 ‘용도’ 자체를 바꾼 화가였습니다. 그림은 더 이상 권력이나 신을 찬양하는 도구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증명해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우리는 지금도 전쟁 사진, 재난 보도, 참혹한 뉴스 화면을 매일같이 마주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미지들을 볼 때마다 늘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런 걸 굳이 봐야 하나?” “너무 잔인하지 않나?”
고야는 이 질문에 이미 200년 전에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화’ 82점 중 상당수를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공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위험하고,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들이 실제로 세상에 인쇄되어 공개된 것은 그가 죽고도 35년이 지난 1863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종군기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를 촬영하는 이유,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불편한 진실을 카메라에 담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첫걸음이라는 믿음입니다. 고야의 그림들은 ‘아름다움’이 예술의 유일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 때로는 ‘불편함’이야말로 예술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또한 그의 개인사는 고통과 고립이 반드시 파괴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줍니다. 청력을 잃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정치적 억압 속에서 살았던 한 노인은 그 고통을 억누르는 대신 벽에 쏟아냈습니다. 그 결과물이 오늘날 프라도 미술관에서 매년 수백만 명이 마주하는 인류의 유산이 되었습니다. 표현되지 못한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쌓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꺼내놓는 행위 자체가 치유이자 기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고야는 자기 삶으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핵심 정리
- 고야는 스페인 왕실의 궁정화가였지만, 40대에 원인 불명의 병으로 청력을 완전히 잃으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 1808년 나폴레옹 프랑스군의 스페인 침공을 직접 목격하며, 전쟁의 참상을 미화 없이 기록한 ‘전쟁의 참화’와 ‘1808년 5월 3일’을 남겼습니다.
- 계몽주의자였던 그는 스페인 사회의 미신과 광기를 풍자한 ‘변덕’ 연작에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는 유명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 말년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목적 없이 자기 집 벽에 ‘검은 그림’ 연작을 그렸으며, 그 대표작이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입니다.
- 그는 권력자의 초상화 속에도 진실을 숨겨 넣는 방식으로 아첨과 고발을 동시에 해내는 화가였습니다.
- 그의 접근은 이후 마네, 피카소 등 근현대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불편한 진실을 그리는 미술’이라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한 문장
고야는 아름다움을 그리는 대신, 세상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진실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는 예술을 만들었습니다.
FAQ
Q1. 고야의 ‘검은 그림’은 왜 자기 집 벽에 그렸나요? 정확한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판매나 전시 목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청력 상실과 전쟁 체험, 노년의 고독과 정치적 압박 속에서 개인적 절망과 성찰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그림들은 이후 캔버스로 옮겨져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Q2. 고야는 왜 청력을 잃었나요? 1792년경 원인 불명의 심각한 병을 앓은 뒤 완전히 청력을 잃었습니다. 정확한 병명은 밝혀지지 않았으며, 납중독, 자가면역질환, 뇌수막염 등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학계에서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Q3. ‘1808년 5월 3일’은 어떤 사건을 그린 그림인가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스페인을 점령한 후, 이에 저항한 마드리드 시민들을 총살형에 처한 실제 사건을 그린 것입니다. 고야는 이 사건 이후 이를 기록하기 위해 이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Q4. 고야의 그림이 후대 화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전쟁의 참상을 미화 없이 그린 그의 접근은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Q5. 고야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나요? 대표작 대부분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검은 그림’ 연작과 ‘1808년 5월 3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등 주요작을 이곳에서 직접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