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 진실을 찾다

소크라테스는 왜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했을까?

기원전 399년 봄, 아테네 아고라의 한쪽 끝에는 ‘바실레우스의 회랑’이라 불리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왕이 사라진 지 오래된 도시였지만, 종교와 관련된 소송은 여전히 이 회랑에서 예심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날 회랑 앞 계단에서 소크라테스는 한 젊은이와 마주쳤습니다. 이름은 에우티프론. 그는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발하러 가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법정에 세우는 행위는 설령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신들의 노여움을 살 만한 불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에우티프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야말로 ‘경건함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정확히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마침 자신도 곧 신성모독 혐의로 법정에 서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이 자신만만한 청년에게 딱 하나만 묻습니다. “그렇다면 경건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 짧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해, 에우티프론의 확신은 몇 차례의 대화 끝에 완전히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훗날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이라는 이름으로 2400년 넘게 살아남은 사고방식의 원형이 됩니다. 대체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정의를 요구하다

에우티프론은 자신 있게 답합니다. “경건함이란 신들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듯한 답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되묻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은 서로 자주 다투고 의견이 갈리는데, 그렇다면 어떤 신은 사랑하고 어떤 신은 미워하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고. 에우티프론은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행위가 동시에 경건하면서도 불경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정의 자체가 모순에 빠진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틀렸다고 선언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그저 에우티프론 자신이 이미 인정한 전제들을 하나씩 짚어 나갔을 뿐입니다. 신들은 서로 다툰다는 것도,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함이라는 것도 모두 에우티프론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단지 그 두 문장을 나란히 놓아 보였습니다. 모순은 소크라테스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에우티프론의 생각 안에 이미 숨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른다’는 말의 무게

이 대화의 구조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엘렝코스(elenchos), 흔히 ‘논박’ 또는 ‘반증’으로 옮기는 절차입니다. 상대가 어떤 주장을 내놓으면, 그 주장 안의 핵심 단어를 다시 정의하게 하고, 그 정의를 다른 상황에 적용해 봅니다. 그러다 상대가 이미 옳다고 믿는 다른 전제와 충돌하는 지점이 드러나면, 상대는 스스로 자신의 첫 주장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 몰립니다. 이렇게 도달하는 막막한 상태를 아포리아(aporia), 말 그대로 ‘길이 없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깁니다. 소크라테스가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어 이기려 했다고 보는 시선입니다. 그러나 그가 대화 내내 반복한 말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였습니다. 이 태도를 후대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부릅니다. 실제로 몰라서 묻는 척했다기보다, 자신이 답을 쥐고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검토하는 사람이라는 태도를 끝까지 유지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가 이미 갖고 있다고 착각한 답의 허점을 함께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하필 질문이었을까

이 방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소크라테스의 절친한 친구 카이레폰의 일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카이레폰은 어느 날 델포이 신전을 찾아가 무녀에게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느냐고. 돌아온 답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신탁을 듣고 당혹스러웠다고 훗날 자신의 재판에서 회고합니다. 스스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탁이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정치인, 시인, 장인 등 아테네에서 지혜롭다고 소문난 사람들을 차례로 찾아가 대화를 시도합니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이 정치를 잘 안다고 믿었지만 캐물으면 금방 흔들렸고, 시인들은 아름다운 시를 쓰면서도 정작 그 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장인들은 자기 기술에는 능숙했지만, 그 능숙함을 근거로 삶의 다른 모든 문제까지 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신탁의 의미를 다시 해석합니다.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단 한 가지는,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뿐이라고. 그리고 이 깨달음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개인적 취미가 아니라 신이 자신에게 맡긴 임무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가 아고라와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아무나 붙잡고 캐묻던 습관은, 원래 남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무지를 확인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산파의 아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는 산파였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대화법을 여기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산파는 아이를 대신 낳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산모 곁에서 진통을 살피고, 그것이 순산으로 이어지도록 돕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남에게 새로운 지식을 넣어 주지 않습니다. 다만 상대가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 세상에 나오도록 돕고, 그 생각이 건강한지 아니면 헛것인지를 함께 가려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문답법이 결국 무엇을 지향하는지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생각을 다듬어 더 단단한 결론에 이르도록 돕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현실에서는 이 산파술이 종종 논박 쪽으로만 기울어, 정작 새로운 답에 도달하기보다 기존의 답을 무너뜨리는 데서 대화가 끝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이 대부분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소피스트와 무엇이 달랐을까

같은 시기 아테네에는 소피스트라 불리는 또 다른 부류의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수사학과 논쟁 기술을 가르치며 수업료를 받았고, 프로타고라스 같은 인물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로 진리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입장을 폈습니다. 소피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든 상대를 설득해 이기는 기술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지점에서 소피스트들과 갈라섭니다. 그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고,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이 아니라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는 일 자체에 집착했습니다. ‘용기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그럴듯한 사례 하나를 답으로 내놓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례는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적용된 결과물일 뿐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이런 태도는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와 정면으로 부딪혔고, 결과적으로 그는 도시 안에서 적잖은 미움을 사게 됩니다.

재판정에서도 멈추지 않은 질문

소크라테스가 평생 캐물었던 대상 중에는 이름난 정치인과 시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의 무지가 드러난 이들은 그를 좋게 볼 리 없었습니다. 기원전 399년, 시인 멜레토스가 정치인 아니토스와 웅변가 리콘의 지지를 업고 그를 고발합니다. 죄목은 청년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인정하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그 순간에도 방식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고발한 멜레토스를 상대로, 평소 시장통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질문을 이어 갑니다. 청년을 타락시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멜레토스가 답을 내놓으면 그 안의 모순을 짚어 냅니다. 결국 재판정에서도 그는 자신을 변호하는 웅변가 대신, 여전히 질문하는 철학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태도가 배심원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배를 마셨습니다.

사라지지 않은 질문의 기술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로도 이 방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미국 로스쿨에서는 교수가 학생에게 판례의 결론을 바로 알려 주지 않고, 질문을 거듭해 학생 스스로 논리의 허점을 찾게 만드는 수업 방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자 드라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속 킹스필드 교수가 학생들을 몰아붙이던 장면은, 이 전통이 얼마나 오래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법정 반대신문도 구조가 비슷합니다. 변호인은 증인에게 결론을 주장하지 않고, 사실 관계를 하나씩 확인하는 질문만 던져 증인이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게 만듭니다. 심리치료 영역에서도 비슷한 기법이 쓰입니다. 인지행동치료를 정립한 정신과 의사 아론 벡은 환자가 가진 왜곡된 믿음을 치료자가 직접 반박하는 대신, 질문을 통해 환자 스스로 그 믿음의 근거를 검토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이론화했고, 오늘날 이를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이라 부릅니다. 도요타 생산 방식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을 때 쓰는 ‘왜’를 다섯 번 반복하는 기법도, 소크라테스와 직접적인 계보는 없지만 구조적으로는 같은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답을 미리 정해 놓지 않고, 질문을 거듭해 스스로 원인에 다다르게 하는 방식입니다.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방식이 늘 좋은 결과로만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문답법의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경우,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진실을 검토하기보다 말꼬리를 잡아 이기려는 논쟁 기술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온라인에서 흔히 보이는 “그럼 그건 왜 그런데요?” 식의 연쇄 질문이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은 채 몰아붙이기만 한다면, 이는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산파술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가 대화 상대로 삼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를 답답하고 무례하다고 여겼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질문을 통한 검토와, 질문을 가장한 공격은 겉모습이 비슷해도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에우티프론은 무엇이라 답했을까

다시 회랑 앞 계단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에게 몇 차례 더 정의를 요구합니다.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란 정의로운 것의 일부다”라고도, “신들이 좋아하도록 제사와 기도를 올리는 기술이다”라고도 답을 바꿔 봅니다. 그러나 매번 같은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 정의가 참인지 알려면 결국 신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데, 애초에 그것을 알고 있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남긴 이 대화편은 결론 없이 끝납니다. 몇 차례의 논박 끝에 에우티프론은 “다음에 또 이야기하자”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자신이 그렇게 확신했던 ‘경건함’의 정의를 끝내 내놓지 못한 채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정작 알고 싶었던 답, 자신의 재판에 도움이 될지도 모를 그 답은 결국 얻지 못합니다. 아마 소크라테스도 그 결과를 크게 놀라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애초에 답을 손에 쥐는 순간이 아니라, 답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그저 익숙한 말이었을 뿐임을 함께 확인하는 순간이었을 테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소크라테스식 문답법과 산파술은 같은 말인가요?

넓게는 같은 대화 방식을 가리키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엘렝코스(문답법, 논박술)는 상대의 주장 속 모순을 드러내 무너뜨리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산파술은 그 과정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 더 나은 생각에 이르도록 돕는 목적에 초점을 둡니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는 이 둘이 뒤섞여 나타나며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몰라서 질문만 한 것인가요?

이 태도를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고 부릅니다. 그가 실제로 아무것도 몰랐다기보다는, 스스로 답을 쥐고 가르치는 위치에 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대화 내내 유지했다는 뜻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오늘날 교육 현장에서는 어떻게 쓰이고 있나요?

미국 로스쿨 수업이나 일부 인문계 세미나에서 교수가 결론을 바로 알려 주지 않고 질문을 거듭해 학생 스스로 논리를 검토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토론식 수업이나 하브루타 교육법에서 비슷한 원리가 활용됩니다.

에우티프론과 그의 아버지 재판은 실제로 어떻게 끝났나요?

플라톤의 대화편은 재판이 열리기 전 장면에서 끝나기 때문에, 실제 재판의 결과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에우티프론이라는 인물 자체도 이 대화편 밖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 실존 인물인지 플라톤이 극적 효과를 위해 구성한 인물인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과 요즘 SNS에서 흔한 꼬리 질문식 논쟁은 같은 것인가요?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소크라테스가 지향한 산파술은 상대를 존중하며 함께 더 나은 결론에 다다르는 과정이었던 반면, 상대를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만 질문을 거듭하는 것은 그가 비판했던 소피스트식 논쟁술에 더 가깝습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주변 사람과 공유해 보세요.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