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했을까? 역사가 숨겨온 반전
1521년 4월 27일 새벽, 필리핀 막탄섬의 얕은 바닷가에서 한 남자가 창에 다리를 찔린 채 쓰러졌다. 그를 둘러싼 것은 1,500명이 넘는 원주민 전사들이었고, 그의 곁을 지키던 부하는 고작 여덟 명뿐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페르디난드 마젤란. 세계일주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한 항해를 이끈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학교에서 “마젤란이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필리핀에서 죽었다. 지구를 반 바퀴도 채 돌지 못한 지점이었다. 그렇다면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한 사람일까, 하지 못한 사람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스페인을 떠난 배 다섯 척과 270명의 선원들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향신료 때문에 시작된 무모한 도박
이야기는 항해가 아니라 돈 문제에서 시작된다. 15세기 유럽에서 후추, 정향, 육두구 같은 향신료는 지금의 금과 다이아몬드를 합쳐놓은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고기를 오래 보관하고 맛을 내는 데 필수였을 뿐 아니라, 향신료를 얼마나 쓰느냐가 그 집안의 부와 신분을 드러내는 척도였다. 문제는 이 향신료가 전부 인도네시아 동쪽 몰루카 제도, 이른바 ‘향료 제도’에서만 났다는 점이었다.
포르투갈은 이미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로 향료 제도까지 가는 길을 독점하고 있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배가 아플 노릇이었다. 그때 한 포르투갈 출신 항해사가 스페인 왕실을 찾아와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아프리카를 돌지 않고 서쪽으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면 향료 제도에 더 빨리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영어식으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다.
왜 하필 포르투갈 사람이 스페인을 위해 항로를 개척하려 했을까? 마젤란은 원래 포르투갈 왕실 소속 항해사였지만, 승진과 처우에 불만을 품고 조국을 등진 인물이었다. 실력은 있었지만 인맥과 신분이 부족했던 그에게, 경쟁국 스페인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유일한 무대였다. 그의 계획은 스페인 왕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1518년 3월 22일 카를로스 1세는 그의 탐험을 공식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마젤란에게 배 다섯 척과 항해 비용을 지원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하나 있다. 마젤란이 스페인 왕실에 제안한 것은 어디까지나 “향료 제도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 개척”이었다. 세계일주는 애초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은, 결과적으로 벌어진 일이었지 처음부터 계획된 여정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다섯 척의 배, 270명의 사람들
1519년 9월 20일, 마젤란은 스페인 남부 세비야를 출발해 다섯 척의 배와 승무원들을 이끌고 역사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승선 인원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237명에서 270명 사이로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가장 널리 인용되는 숫자는 270명이다. 트리니다드호, 산 안토니오호, 콘셉시온호, 빅토리아호, 산티아고호. 이 다섯 척의 이름을 기억해 두자. 이야기가 끝날 무렵, 이 배들이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가 곧 이 항해의 전체 요약이 되기 때문이다.
선단이 남아메리카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여정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겨울이 되도록 태평양으로 빠져나갈 해협을 찾지 못하자, 선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폭발했다. 1520년 겨울이 되도록 해협을 발견하지 못하자 선원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규모가 총 다섯 척 중 세 척에 달했다. 다섯 척 가운데 세 척의 선장과 선원들이 마젤란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지휘관 한 사람을 뺀 함대 전체가 반란에 가담한 셈이니, 이쯤 되면 항해라기보다 내전에 가까웠다.
마젤란은 이 반란을 잔혹할 만큼 신속하게 진압했다.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은 은밀히 숨겨둔 칼로 살해당했고, 다른 한 명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끔찍한 폭력이지만, 당시 대양 한복판에서 지휘관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곧 전멸을 의미했다. 마젤란에게 반란 진압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마젤란 해협, 그리고 태평양이라는 이름의 함정
반란을 진압한 뒤에도 해협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남아메리카 최남단, 지금의 마젤란 해협에 도달하기까지 선단은 몇 달을 더 헤매야 했다. 마침내 해협을 통과했을 때, 다섯 척 가운데 이미 한 척은 난파했고 다른 한 척은 몰래 이탈해 스페인으로 돌아가 버린 뒤였다. 남은 것은 트리니다드호, 콘셉시온호, 빅토리아호 세 척뿐이었다.
해협을 빠져나온 마젤란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보고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파도가 이상하리만치 잔잔했기 때문에, 그는 이 바다에 ‘태평양(Pacific Ocean, 평화로운 바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이름은 역설이었다. 마젤란과 선원들은 태평양의 실제 크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들은 며칠, 길어야 몇 주면 아시아 해안에 닿을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태평양 횡단은 무려 넉 달 가까이 걸렸다. 그 사이 신선한 물과 식량은 완전히 바닥났다. 선원들은 배를 갉아 먹는 쥐를 잡아먹었고, 심지어 돛을 고정하던 가죽끈을 삶아 먹었다. 괴혈병으로 잇몸이 썩어 들어가 음식을 씹지도 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이 구간에서만 선원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것이 이 항해의 절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선원들에게 가장 지옥 같았던 구간은 ‘평화로운 바다’라고 이름 붙인 태평양이었다.
필리핀, 그리고 지휘관의 죽음
1521년 3월, 뼈만 남다시피 한 선원들을 태운 배는 마침내 육지, 지금의 필리핀 제도에 도착했다. 원주민들과의 첫 만남은 우호적이었다. 마젤란은 세부섬의 지역 지도자 라자 후마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 삼아 인근 세력을 스페인의 영향권 안에 두려 했다.
문제는 막탄섬의 족장 라푸라푸였다. 그는 후마본과 경쟁 관계에 있었고, 스페인 편에 서기를 거부했다.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굴복시키기 위해 직접 군사 작전을 지휘하기로 한다. 여기서 마젤란은 치명적인 오판을 저지른다. 겨우 예순 명 남짓한 병력으로, 그것도 상륙정을 이용해 얕은 물에서 싸운다는 계획이었다. 갑옷을 입은 스페인 병사들은 무릎까지 오는 물속에서 발이 묶였고, 반대로 지형에 익숙한 원주민 전사 1,500여 명은 자유롭게 움직이며 화살과 창을 퍼부었다.
마젤란은 원정 도중인 1521년 4월, 지금의 필리핀 세부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일자는 4월 27일이다. 다리에 독화살을 맞고 쓰러진 그를 부하들이 구하려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마젤란은 자신이 그토록 개척하려 했던 향료 제도에 발도 딛지 못한 채, 항해를 떠난 지 불과 1년 반 만에 이국의 바닷가에서 숨을 거뒀다.
여기서 우리가 답을 찾고 있던 질문의 절반이 풀린다. 마젤란은 세계를 절반도 돌지 못한 채 죽었다. 그렇다면 세계일주는 누가, 어떻게 완성했는가.
마젤란이 죽어도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마젤란의 죽음 이후 벌어진 일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배신극이다. 원정대에는 ‘말라카의 엔리케’라는 통역사가 있었다. 그는 원래 마젤란의 노예 신분이었는데, 마젤란은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엔리케를 해방시키라고 남겼다. 그러나 원정대는 엔리케의 능력이 여전히 필요했기에 마젤란의 유언을 무시했다. 배신감을 느낀 엔리케는 복수를 계획했고, 세부섬 지도자를 부추겨 원정대 간부들을 연회에 초대하도록 손을 썼다. 연회에 참석한 간부급 27명이 그 자리에서 모두 살해당했고, 남은 선원들은 황급히 세부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 사건으로 항해는 사실상 붕괴 직전까지 몰렸다. 스페인을 떠날 때 277명이었던 원정대는 어느새 115명으로 줄어 있었고, 다섯 척이던 함대도 겨우 두 척만 남았다. 배를 몰 사람조차 부족해, 남은 두 척의 배는 선원 수를 맞추느라 콘셉시온호를 불태워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해야 했다.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살아남은 선원들 중 한 사람이 실질적인 리더로 떠오른다.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몇 달 전 마젤란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형까지 각오했던 반역자가, 지휘관의 죽음 이후 함대를 이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역사는 가끔 이런 식으로 뒤틀린 농담을 던진다.
엘카노, 반란자에서 세계 최초의 사나이로
엘카노가 이끄는 남은 두 척은 마침내 목표했던 향료 제도, 티도레섬에 도착한다. 남은 두 척의 배는 거의 다섯 달을 헤맨 끝에 1521년 11월 8일 목적지인 향료 제도의 티도레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육두구와 정향, 계피를 배에 가득 실었다. 어찌나 욕심을 냈던지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향신료를 실었고, 닻을 올리자마자 한 척이 침수되기 시작해 급히 수리해야 했을 정도였다.
결국 배 한 척은 수리를 위해 남고, 엘카노는 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을 이끌고 귀환을 결심한다. 그런데 여기서 엘카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왔던 길, 즉 태평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를 거쳐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그대로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 항로는 포르투갈의 영해나 다름없어 나포될 위험이 컸지만, 향신료를 가득 실은 배가 다시 그 지옥 같은 태평양을 건널 가능성은 더 희박했다.
이 선택이 결정적이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지 않고 계속 서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빅토리아호는 결과적으로 지구를 한 바퀴 온전히 도는 항로를 완성하게 된다. 마침내 1522년 9월 6일, 빅토리아호 단 한 척만이 스페인 산루카르 항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떠날 때 270명이었던 승선 인원 가운데, 인디오 세 명을 포함해 겨우 열여덟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숫자로 정리하면 이렇다. 270명 중 18명. 생존율로 따지면 7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섯 척 중 한 척. 3년이라는 세월. 세계일주라는 업적의 이면에는 이런 압도적인 희생이 있었다.
스페인 왕실은 이 항해를 이끌고 돌아온 사람이 마젤란이 아니라 엘카노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스페인 왕실은 이후 엘카노에 대하여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인물로 공인했으며, ‘프리무스 서컴데디스티메(Primus circumdedistime)’, 즉 ‘우리 주위를 최초로 돈 사람’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실 문서에 공식적으로 이름이 새겨진 최초의 세계일주자는, 그러니까 반란을 일으켰다가 지휘관의 자리를 물려받은 바스크 출신 선원이었다.
그렇다면 마젤란은 왜 아직도 ‘세계일주의 아버지’로 불리는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당연히 의문이 든다.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사람이 엘카노라면, 왜 역사책은 여전히 마젤란의 이름을 앞세울까?
답은 ‘기획’과 ‘완성’을 구분하는 데 있다. 서쪽으로 항해해 향료 제도에 이르고, 궁극적으로 지구를 도는 항로가 가능하다는 것을 구상하고 왕실을 설득해 실행에 옮긴 사람은 마젤란이었다. 항해의 절반, 가장 험난했던 구간인 남미 해협 통과와 태평양 횡단을 지휘한 것도 그였다. 반면 엘카노는 마젤란이 닦아 놓은 항로의 나머지 절반을 완주한 사람이다. 비유하자면, 마라톤 코스를 처음 설계하고 절반을 가장 어렵게 뛴 선수와, 그 선수가 쓰러진 뒤 배턴을 이어받아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의 관계와 비슷하다. 둘 다 없었다면 완주는 불가능했다.
다만 역사적 평가에서 마젤란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더 크게 남은 데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마젤란은 스페인 왕실이 공식적으로 임명한 원정대장이었고, 항해의 ‘얼굴’이었다. 유럽인들 입장에서 ‘이름 없는 향료 제도로 가는 새 항로’를 처음 제안하고 왕을 설득해 실행한 서사가, 반란자 출신의 항해사가 우연히 지휘봉을 이어받아 완주한 서사보다 훨씬 극적이고 기억하기 쉬웠던 것이다. 역사는 종종 가장 상징적인 이름을 기억하지, 가장 실질적인 공로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이 항해가 증명한 것, 그리고 오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마젤란의 항해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처음 증명되었다’는 말이다. 사실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학자들이 있었고, 콜럼버스도 지구가 둥글다는 전제 위에서 항해를 계획했다. 마젤란의 항해가 증명한 것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실제로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실증적 경험이었다. 이론과 실제 항해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이 항해는 그 간극을 몸으로 메운 사건이었다.
또 하나 이 항해가 남긴 뜻밖의 증거가 있다. 선원들이 3년 가까이 항해 일지를 꼼꼼히 기록하며 날짜를 셌는데도,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계산해 보니 실제 날짜보다 하루가 모자랐다. 지구를 서쪽으로 돈 탓에 생긴 시간 오차, 오늘날로 치면 날짜변경선 문제를 인류가 처음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아무도 하루를 빼먹지 않았는데 하루가 사라진 이 현상은, 당시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더 큰 충격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비교로 보는 항해의 시작과 끝
| 구분 | 출항 시점 (1519년) | 귀항 시점 (1522년) |
|---|---|---|
| 배 척수 | 5척 | 1척 (빅토리아호) |
| 선원 수 | 약 270명 | 18명 (생환자) |
| 지휘관 | 페르디난드 마젤란 |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 |
| 항해 목적 | 향료 제도로 가는 새 항로 개척 | 결과적으로 세계일주 완성 |
| 신분 | 왕실 공인 원정대장 | 前 반란 가담자 |
오늘날 우리에게 남은 이야기
5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항해가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는,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 한 사람의 순수한 영웅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한 명의 천재가 이뤄낸 성취’로 단순화해서 기억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기획자의 야심, 선원들의 반란, 지휘관의 죽음, 배신과 학살, 그리고 반란자였던 사람의 우연한 완주가 뒤엉킨 결과물이었다. 270명 중 18명만 살아 돌아왔다는 숫자는, 인류의 큰 도약이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희생 위에 세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에 도착하는 것도, 위성으로 실시간 항로를 확인하며 안전하게 항해하는 것도, 결국 이 죽음의 항해가 인류에게 남긴 지도 위에서 출발한 일이다. 세계일주라는 개념 자체가 이 사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발상이었다.
핵심 요약
- 마젤란은 1519년 5척의 배와 약 270명을 이끌고 스페인을 출발했지만, 1521년 4월 필리핀 막탄섬 전투에서 사망해 세계일주를 완성하지 못했다.
- 남은 선원들은 마젤란 사후 배신과 학살, 반란 등을 겪으며 다섯 척 중 한 척, 270명 중 18명만 남는 참혹한 손실을 입었다.
- 실제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스페인에 귀환한 지휘관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였으며, 스페인 왕실은 그를 최초의 세계일주자로 공인했다.
- 마젤란은 항로를 기획하고 가장 험난한 구간을 개척한 인물로, 엘카노는 그 여정을 완주한 인물로 각각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이 항해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처음 증명한 것이 아니라,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오늘의 한 문장
마젤란은 세계일주라는 항로를 설계했지만, 그 여정을 완성한 것은 한때 그에게 칼을 겨눴던 반란자였다.
FAQ
Q1. 마젤란은 정말 세계일주를 하지 못했나요? 그렇다. 마젤란은 1521년 4월 필리핀 막탄섬에서 전투 중 사망해 지구를 절반도 돌지 못했다. 항해를 끝까지 완주해 스페인으로 돌아온 것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가 이끄는 빅토리아호였다.
Q2.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스페인 왕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세계일주자는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다. 다만 항로를 기획하고 항해의 절반을 지휘한 인물은 마젤란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두 사람 모두를 함께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Q3. 마젤란의 함대는 왜 필리핀에서 전투를 벌였나요? 마젤란이 세부섬 지도자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뒤, 이에 협조하지 않은 막탄섬 족장 라푸라푸를 굴복시키려 군사 작전을 감행했다가 열세한 병력으로 반격을 받아 전사했다.
Q4. 마젤란 해협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나요?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이 좁은 해협을 마젤란의 함대가 처음으로 통과하면서 그의 이름이 붙었다. 이 해협을 발견하기까지 선단은 몇 달간 남미 해안을 헤맸다.
Q5. 왜 태평양이라는 이름이 붙었나요?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온 뒤 마주한 바다가 유독 파도가 잔잔해 보여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횡단에 넉 달 가까이 걸리며 선원 다수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목숨을 잃은 가장 가혹한 구간이었다.